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왕권을 높이라(04)_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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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9-22본문
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왕권을 높이라(04)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롬 12:2)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둘러싸고는 예로부터 수많은 질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세상에서 삶을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는 이른바 웰빙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해 왔고, 그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 답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모습도 달라져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삶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지만, 많은 사람은 개인의 일상에서 직접 마주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삶을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주로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건강을 삶의 목적으로 삼을 때의 문제
실용적인 삶이 지향하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건강상의 어려움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이 앞으로는 가능한 한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건강 자체가 삶의 최종 목적이 되어 건강만을 지나치게 추구하게 되면, 건강을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끊임없이 확인하고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인터넷과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건강 정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정보의 양이 많다고 해서 그 내용이 모두 정확하거나 개인의 상황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극적인 제목과 불안을 유발하는 표현으로 시청자의 관심을 끌지만, 실제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널리 알려진 뻔한 이야기나 구독과 조회를 유도하는 요청만 남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건강 정보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여러 진료과를 차례로 찾아다니며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건강기능식품까지 더해 약을 식사처럼 챙겨 먹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이 오히려 약물과 각종 건강 정보에 대한 심리적 의존으로 이어지고, 불안과 강박이 커져 정신적인 건강까지 해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결국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시작한 추구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오히려 건강을 잃게 만드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편리함과 풍요를 삶의 목적으로 삼을 때의 문제
사람들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수고와 불편을 줄이고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추구해 왔습니다. 세탁기와 건조기처럼 가사 노동을 덜어 주는 기기에서 시작해 키오스크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활을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다양한 기술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와 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변화에 익숙하지 않거나 새로운 사용 방식을 쉽게 습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불편함과 소외감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현대 문명의 도구가 인간의 삶을 돕는 동시에 그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변으로 밀어낼 수 있다는 경고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어떤 이들에게는 생활의 부담을 덜어 주는 수단이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사회에 참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을 위협하는 장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급속한 확산 역시 이러한 양면성을 보여 줍니다.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조급함이 사람들을 짓누르면서,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오히려 인간이 지닌 고유한 능력과 사람다운 모습을 잃게 만드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삶의 목적으로 삼을 때의 문제
경제적 풍요는 많은 사람이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중요한 목표이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충분한 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의 성공과 경제적 성취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자신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조급함과 현재의 삶에 대한 박탈감이 커질 수 있으며, 이러한 감정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삶의 본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적 안정과 같은 실용적인 삶의 목표는 어떤 사람에게는 삶을 개선하는 데 유익할 수 있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어려운 다수에게는 상대적 소외감과 지속적인 불안을 안겨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가능성과 한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는 삶의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삶이 특정한 실용적 가치 하나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폭넓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제기됩니다. 그 재료로 제시되는 것이 인문학, 곧 문학과 역사, 철학입니다. 이들은 당장 현실에 바로 쓸모 있는 도구는 아니지만, 인간을 의미 있게 형성하는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그러나 인문학이 삶의 근본적인 답을 줄 수 있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요소가 있고, 그것은 문학과 역사, 철학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부조리로 가득하고, 철학 속에는 온갖 기괴한 상상도 들어 있습니다. 인문학은 결코 순수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성경이 인간의 삶을 비로소 올바르게 비춰 줄 때, 우리는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 스며든 세상의 목적들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기독교 신앙도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향이 신앙 안으로 그대로 스며들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복 신앙입니다. 많은 사람은 안전과 풍요, 건강과 번영을 얻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그 신앙을 결과로 평가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 일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거나, 차라리 믿어 보아야 소용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형태의 기복 신앙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매우 현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믿으면 반드시 성공하고 출세한다는 생각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성경적 신앙과는 다릅니다. 언약의 복은 기복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언약의 복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얻는 복을 뜻합니다. 그 핵심 명제는 “너는 내 백성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 그것이 언약의 복입니다. 이는 안전과 번영 그 자체를 구하는 기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입니다.
또 다른 왜곡은 내세 중심의 신앙, 곧 피안만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성경의 일부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한 부분만 강조하는 신앙의 위험
신앙이 잘못되는 데에는 여러 중요한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성경의 한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중생만 강조하거나, 내세만 강조하거나, 번영만 강조하는 신앙은 결국 성경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만을 취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그런 식으로만 말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균형과 깊이를 온전히 전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편향은 역사적으로도, 문맹률이 높던 시대에 가르침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야 했던 사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되고, 천주교에서 영세만 받으면 구원이 보장된다고 가르쳤던 것처럼, 기독교 안에서도 주기도문만 외우면 되는 식의 단순화가 이루어진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이끌어 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는 건강, 풍요,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정신세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그대로 본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교리와 실천, 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리는 믿음의 내용이고, 실천은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믿음과 삶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믿음과 삶을 함께 가르치는 개혁신학
아브라함 카이퍼는 기독교 신앙이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사회 전체를 변화시켜야 하는 사상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믿음과 삶을 함께 가르치는 기독교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제시했습니다. 그에게 칼빈주의는 단순히 특정 교파를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비롯해 정치·경제·문화·사회생활 전반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 이끌어 가는 포괄적인 삶의 체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혁신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신앙의 총체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전통과 연결됩니다. 실제로 칼빈주의가 뿌리내린 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사상과 가치관이 변화하고 사회의 풍조도 달라졌으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직업 활동을 통해 경제생활이 균형 있게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변화가 현대 자본주의의 직업윤리와 경제 질서가 형성되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서 배운 말씀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기보다, 자신에게 은혜롭고 위로가 되는 내용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밖의 삶에서는 세상의 방식과 기준을 그대로 따르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가치와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에 따라 그것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왕권을 믿고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신의 힘과 능력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권위와 약속을 붙들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그분의 이름과 권위 아래서 나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자 분명한 명령입니다. 갈수록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현실 앞에서도 주님께서는 이미 가르쳐 주신 이 진리들을 우리가 다시 붙들고 세상 가운데 선포하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미 배웠고 수십 년 전부터 익히 들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여 실제로 선포하지 못하고 이 믿음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를 진정으로 믿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하여 의미를 지닌 말씀으로 명령하고 있으며, 그 모든 명령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이루실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 뜻에 순종하여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만 위축되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분명히 붙들고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단지 믿는다고 말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믿음으로 일어나 실제 삶 속에서 순종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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