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9)_하나님의 영광이 기준이다 (고전 1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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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6-07본문
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9)
하나님의 영광이 기준이다 (고전 10:31-33)
다양성은 교회를 풍성하게 한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 문제들이 결국 이 교회를 넘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른 교훈을 통해 교회를 다시 바르게 세우려고 노력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즉 교회의 지체들은 문화적인 배경과 각종 경험과 신앙 양심의 문제와 같은 자신만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입장과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다양성으로 인하여 더욱더 풍성하게 되고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다양성은 교회를 더욱더 풍성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끼리만 있으면 우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오고 새로운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과 그들의 섬김이 더해져야 우리 교회는 더욱더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기존의 단단한 공동체의 결속력, 껍데기를 깨고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는 분명히 이렇게 다양성으로 인해 더욱더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릭 워렌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교회를 자신의 “모양”(SHAPE)으로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SHAPE는 다섯 개 단어의 첫 글자를 조합한 말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S는 Spiritual gifts, 영적 은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적 은사를 받아 자기가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더욱더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섬길 때 섬김을 받은 성도가 그 섬김의 유익을 얻으면서 더욱더 은혜가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H는 Heart를 말합니다. Heart는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것에 대한 열망과 갈망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마음의 움직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일을 꼭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보다 그 일을 섬기는 데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 일을 하라고 하면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면 그가 더 기쁘게 섬길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A는 Ability, 재능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재능을 받아 교회와 이 세상을 섬기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재능을 때로는 달란트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립니다. 어떤 사람은 글씨를 잘 씁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잘 씁니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재능들을 우리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곳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P는 Personality, 성품의 특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르게 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감싸주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강력하게 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달래가면서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인격적 특성들이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E는 Experience, 경험입니다. 경험은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험에는 가족 경험. 교육의 경험이 있습니다. 또 교육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직업경험 입니다. 또한 섬김, 즉 봉사의 경험도 있습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고난의 경험입니다. 고난은 아주 중요한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고난 받은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경험의 다양성은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양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양성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시험에 들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모습들은 다양한 견해로 나타나고, 다양한 견해는 서로 충돌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견해의 충돌 때문에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분열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까요? 성경이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문제라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 무조건 순종해야 할 것이고, 성경 구절을 말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는 일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에게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교훈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직면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말씀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지금 새롭게 나타나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자유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9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규정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런 자유를 가지고 교회와 교회의 지체들을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는 일에서 사람들이 고집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고집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다고 해서 방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 시간에도 배우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한 사람들이지만 방종으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유익한가? 또 덕을 세울 수 있는가? 이때 유익과 덕을 판단하는 것은 공동체의 관점입니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하여 그 일이 유익할까요?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자유롭게 항한 그 일이 공동체를 유익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 덕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성도들에게 믿음의 유익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자유롭게 행한 일이 다른 성도의 믿음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해치고 그 마음을 은혜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써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칼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유를 탐식과 사치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조금 비싼 것을 먹을 수도 있고 싼 것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견해 때문에 탐식과 사치도 괜찮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성도들의 마음도 입장을 살펴서 절제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여, 즉 자신의 견해 때문에 다른 지체를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강하게 주장하면 자신의 마음이 시원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의 견해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자신의 자유, 자신의 견해를 포기해야 할까요? 첫째는 다른 지체의 양심을 위하여 포기해야 합니다. 약한 지체는 아직 거기까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그 약한 지체의 양심을 위하여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내가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고기를 먹는 일로 믿음이 약한 성도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 이것이 바로 포기입니다.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겠습니다. 이렇게 포기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우리는 포기하면 절망과 실망, 혹은 자기의 자존심이 상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체의 양심을 생각하여 이렇게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합니다. 자유에는 포기의 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포기의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되는 마땅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다른 지체의 양심을 위하여 포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둘째는 공동체를 위하여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평안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의 자유, 우리의 견해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자기의 견해를 관철하기 위하여 공동체의 무너짐도 불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깨뜨려서라도 내 입장, 내 견해를 관철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교회는 큰 시험에 빠지게 되고, 그 시험이 해결되지 않으면 분열하게 되는 일까지도 일어납니다. 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는 견해와 입장이 있다면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발휘하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그런즉 지금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즉 교회의 구성은은 다양한 입장과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그 격차가 아주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경이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분쟁
또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것을 교회 역사에서는 아디아포라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아디아포라는 성경이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문제들을 말합니다. 때로는 사소한 문제, 주변의 문제나, 혹은 견해 차이 라고 말합니다. 아디아포라 문제를 해결해 나아갈 때 어떤 입장, 혹은 원칙, 혹은 순서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는 성경의 원리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법의 원리입니다. 세 번째로는 목회자의 지도입니다.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다룰 때 이 세 가지의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두 번째 무엇입니까? 교회법입니다. 세 번째로는 무엇입니까? 목회자의 지도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목사를 찾아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목사를 찾아오지 아니하고 자기의 생각과 견해를 강조하고 그 견해가 마치 성경의 견해인 것처럼 절대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목사를 찾아와서 그 문제를 상의하고,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는 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지도하는지 상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할 때 평생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목사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목사와 함께 의논하면서 좋은 길이 무엇인지 찾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자유를 포기할 때에는 원칙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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