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12)_목자유친 (히 1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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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6-28본문
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12)
목자유친 (히 13:17-19)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오늘 말씀의 제목은 ‘목자유친’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예부터 가르쳐 왔던 오륜 중에 ‘부자유친’이라는 말을 페러디 한 것입니다. 부자유친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는 의미입니다. 부모 자녀 사이의 친밀함은 가정을 잘 이루어가는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목회자를 영적인 아버지로 부르는 구절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느니라.”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하면서 목회자들이 이 인도하는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협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인도자입니다. 그는 인도할 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법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방법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방법에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시고, 그 속에서 전후좌우로, 동서남북으로 다 다녀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이 놀라운 역사를 교회에서 누가 실제적으로 진행하고 있을까요? 목회자가 이 일을 담당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인도하는 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는 사람
목회자들은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영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목회자의 사역에는 성도들의 육신의 삶을 위하여 기도하고, 어려운 삶을 살피는 일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1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성도들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성”이란 “깨어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대에서 군인들은 날마다 보초를 섭니다. 바로 이렇게 보초를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일이 보초를 서는 것입니다. 물론 군인들은 낮에도 보초를 섭니다. 그러나 밤에 남들이 잠잘 때 가장 중요한 일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보초를 서는 일입니다. 전국에 있는 어떤 부대든지 밤에 근무를 섭니다. 그리고 그 근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전방에서는 보초 근무가 군대 생활의 거의 전부입니다. 이와 같이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순간도 졸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보이겠습니까? 목사는 눈에 불을 켜고 교회와 성도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러니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입니다. 목사가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인다면 더 이상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목사는 경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지나치는 것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남들은 괜찮다고 해도 한 번 더 살펴봐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성도들을 위해서는 안전한 것입니다. 그가 경성하는 일, 경계 근무를 포기하거나 대충하면 성도들과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몇 년 전에 휴전선을 넘어서 북한군 한 사람이 귀순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은 그 북한병사가 우리 군대 매내무반 문을 두들리 때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병사들이 자고 있는 내무반에 누가 문을 두드려서 문을 열어봤더니 북한 군인이 귀순하러 왔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중에 노크 귀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군대 전부가 난리가 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영혼을 살피는 일, 그들의 삶을 살피는 일을 끝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렵다고 해서 대충 넘어가서도 안 됩니다.
성도들을 대신하여 청산하는 사람
그다음에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청산은 빚이나 임금이나 갚아야 하는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행원들은 하루 일과가 끝난 후 하루 입출금을 정산해야 합니다. 단 돈 1원이라도 틀리면 맞을 때까지 다시 해야 한다고 합니다. 틀리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청산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살지 않는 그 부분이 빚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이 빚을 목회자가 청산해야 한다는 이야기말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겨 충성하는 분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에 반드시 그런 분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분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런 분들에 대하여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청산해야 할까요? 목회자가 청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그 책임의식이 강해야 할지, 목회자에게 그러한 책임 의식이 없다면 목회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놀기 위해서, 잘 되기 위해서 목회 일을 한다면 그는 실수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놀기 위해서 목회를 할까요? 편하기 위해서 목회를 할까요? 아닙니다. 그가 행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게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청산하게 하시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되어야
그러면 이러한 일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에게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순종해야 합니다. 계속 해서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권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위해서 자신들이 해야 되는 역할들을 잘 감당하고,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가 될 때,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아름답게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사랑하지 아니하고, 신뢰하지 아니하고, 서로에게 주어져 있는 일을 바로 감당하지 아니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가는 관계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위하여 결정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씀으로 성도들을 인도할 때 성도들은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 사실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이 말씀을 가르쳤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얼마나 은혜가 넘치고, 또 모든 지방에 믿음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그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이 말씀을 가르칠 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씀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역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니 교회가 얼마나 믿음으로 영광스럽게 세워지고 그 믿음이 온 지역으로 소문나고 모범이 되는지, 이 모든 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성도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관계가 변하다
갈라디아 교회는 목회자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를 천사와 그리스도처럼 영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4:14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의 육체에 시험거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 눈과 관계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육체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그와 같은 사도 바울에 대하여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었다고 까지 말씀합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섬겼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 일정 기간 후에, 그때까지도 그와 같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이 변했던 것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한때는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 사도 바울이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참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서로 죽고 못 사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변했습니다. 변화의 이유는 바울이 참된 말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친함이 진리의 교제보다 앞섰기 때문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요? 갈라디아 교회에 할례당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당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잘 섬겼는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할례당에게 마음을 쏙 빼앗겨 할례당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들의 편을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오”(갈 4:17). 여기 그들은 할례당을 가리킵니다. “할례당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오,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하여금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니라.” 할례당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진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할례당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할례당이 얼마나 잘해줬는지 거기에 쏙 빠져서 그만 진리와는 상관없이 할례당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친해져서 진리와 상관없이 자기들의 입장과 자기들의 견해를 서로 밀어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목회자와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일로 작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친해져도 목회자의 관계를 넘어서거나 진리의 가르침을 넘어서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러났습니다. 할례당이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들에게 잘 했습니다. 결국 성도들이 그들을 옹호하느라 사도 바울이 진리를 가르쳐도 듣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할례당은 나한테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먼저가 아니고, 목회자의 가르침이 먼저가 아니고, 이 사람들과의 친밀함이 먼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결정적인 관계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까지 말씀합니다. 다시 내가 해산하려면 얼마나 큰 아픔과 고통이 될까요? 여기 해산하는 수고를 또 다른 말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20절). 언성을 높이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될 때 언성을 높이고 호통을 쳐서라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진짜 아버지요 진짜 어머니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사생자입니다. 진짜 부모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세워지기 위하여 목회자는 자기의 본분을 다 해야 할 것이고, 성도들은 목회자가 그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도록 순종하고 복종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자기의 책임을 위하여 언성을 높인다면, 자기의 책임을 위하여 책망을 한다면 그것을 부모님이 책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책망을 달게 받고 고쳐야 할 것들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아름답게 발전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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