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를 바라보자(11)_그리스도의 겸비의 영광⓶(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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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9-26본문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를 바라보자(11)
그리스도의 겸비의 영광⓶(빌 2:5-8)
그리스도의 두 신분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것과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일들을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분이라고 하는 항목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신분은 지위의 어떤 상태, 특권, 또 거기서 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고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자로서 그 권능과 영광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지상에 인성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럴 때 그분에게서 신분의 차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여전히 그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러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성부의 권세, 혹은 성부의 리더쉽을 인정하고 그 리더십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되심을 상실한 것도 아니고 포기한 것도 아니고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성을 취하신 일로 신분의 변화를 겪으셨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본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성에 의하여 감추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분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히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낮아지신 비하(卑下)의 신분과 높아지신 승귀(昇貴)의 신분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바로 이 두 개의 신분을 가지고 설명하고, 또 고백하고 있습니다.
낮아지심, 또는 비하의 신분
오늘 우리가 생각할 첫 번째 신분은 비하의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의 비하는 겸손으로부터 시작되며 겸비로 이어지는데 그 신분은 상태라고 하는 것을 가지게 됩니다. 가령 대령이 진급을 하여 장군이 되면 신분의 변화와 함께 그가 누릴 수 있는 가지가지 특권들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강등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때에도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영광 가운데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장군이 별을 달고 있다가 이등병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낮아지심, 혹은 비하라고 부르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신분에는 그에 걸맞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계시다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신분의 변화는 그분의 상태에 의해서 훨씬 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보통 그리스도의 상태에 대해서 5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입니다. 둘째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지가지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셋째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넷째는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신 것입니다. 다섯째는 음부, 즉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4가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둘째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셋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넷째는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입니다. 사도신경은 이상 네 가지 외에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즉 승귀의 신분에 대해 4가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의 의미
이 중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할 내용은 낮아지심의 상태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마스크, 혹은 인두겁이라고 부르는 껍데기 같은 것을 입으셨다는 말일까요? 이런 오해의 여지 때문에 어떤 분들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표현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까지 가지신 온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사람이셨습니다. 참사람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육신과 영혼을 다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육신만 가지고 있고 영혼이 없으면 참사람일 수 없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로고스가 육신을 취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과 하나님의 로고스가 결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참사람이라고 하는 고백을 부인하는 주장입니다. 참사람이 아니면 사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셨다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육신만 입고 오셨다면 인간의 죄는 육신의 영역에서만 해결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 되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완전함을 위하여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신과 영혼 모두가 참된 인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대신할 수 있었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들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비밀이고 신비입니다.
계속해서 낮아지심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이것은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죄의 비참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하고 추방당했을 때, 이 세상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변화되었습니다. 자연은 죄인 된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언제나 인간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늘 상기시키는 가지가지 비극적인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이와 같은 비극 속에 있다는 사실과 이 비극에서 구원받기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죄의 비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인간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또한 싸우고 다툽니다. 심지어는 전쟁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자연 세계는 식량이나 혹은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충분하게 공급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그 부족한 부분 때문에 인간 사이에는 가지가지 투쟁들이 일어나고, 그 부족함 때문에 영양실조와 같은 육신의 건강에도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국 질병과 나중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죄의 비참입니다. 죄의 비참이 우리 인간에게는 고난입니다. 인간의 삶을 생로병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생로병사 가운데 있다는 것은 고난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고난은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비참, 이것을 다 겪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실제적으로 집행하는 형벌의 집행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낮아지신 상태에서 더 낮아지셨습니다. 인간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인간이 겪는 모든 비참을 겪으시되 죽음이라고 하는 죄에 대한 심판과 형의 집행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점점 낮아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번째,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갈 데까지 가셨습니다. 무덤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심”의 문제에 대해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우리 말 사도신경에는 없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학적 논쟁 때문에 뺐다고 말합니다. 있는데 뺐다 니 마음이 좀 꺼림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일부러 뺀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 자체가 처음부터 완성된 모양으로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다양하게 발전돼 온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결된 모습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음부로 내려감이라고 하는 이 다섯 번째 항목이 들어 있는 사본은 390년 정도의 것입니다. 즉 다섯 번째 항목, 음부로 내려감, 지옥으로 내려감이라고 하는 구절은 실상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부분을 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안 빼면 어떨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신학적 논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교회의 경우 지금도 여전히 이 구절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신 후에 3일 후에 부활하셨는데, 그 사이에 음부, 지옥에 가셨다 고 가르칩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가신 음부는 선조 림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로마교회는 죽은 후의 세계를 여러 가지로 세분하고 있는데,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연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은 최소한 세례는 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세례를 받고 제대로 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세례는 받았으니 연옥에 가서 연단을 받고 한 층 한 층 승급해서 마침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천국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림보는 무엇일까요?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즉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림보라고 하는 곳에 가 있다가 그곳에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선조 림보라고 하는 장소의 의미입니다. 또한 유아 림보라는 것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아 림보는 유아 세례를 받기 전에 일찍 죽은 아이들이 가는 곳 입니다.즉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 림보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림보에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우리에게 위로는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명복을 비는 행위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경과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옥과 림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음부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장사 지낸 바 되셨다는 것을 더욱더 확정짓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실제로 행해진 어떤 사건이라기보다는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음부로 내려가심이라고 하는 수사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영광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신분과 그 신분에 따르는 여러 가지 상태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신분과 상태에 대해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아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신분은 무엇이 되는 걸까요? 죄인입니다. 그런데 신분은 죄인인데 구속되지 않은 상태면 아직은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이제 그는 투옥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형을 마치기까지 감옥생활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상태의 변화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낮아지신 신분에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육신과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장사된 바 되셨다가, 그리고 아무 소망도 없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하는 상황으로 상태가 점점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어디까지 낮아지심입니까? 죽기까지 낮아지심 입니다. 더 나아가서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 상황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낮아지심을 흉내만 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시고,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을 때, 이 모든 일들을 그냥 흉내만 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마지막 순간, 마지막 1% 먼지 한 톨까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들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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