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8)_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잘못된 열망 (고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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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5-30본문
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8)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잘못된 열망 (고전 1:1-3)
교회를 보는 참된 시각
지난 주중에 책을 읽고 묵상을 하다가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을 묵상하고 있는데, 그 책에서 “목회자가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교회를 망치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회자가 성도들에 대하여, 또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목회자들이 가지기 쉬운 특성입니다. 아니, 목회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에 대하여, 또는 성도들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성도들의 어떤 말과 행실에 대하여 늘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것이 원망과, 혹은 불평으로 넘어가고, 그것이 그의 인격이 되어 버리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 또한 이런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이 문제를 가지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지냈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린도전서 1장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2절 주석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결코 그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세워지게 된 근본적인 그 기초, 그리고 교회를 보시는 하나님의 뜻 등을 통해 교회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교회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될까요? 본회퍼는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잘못된 열망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또한 좋은 목사님은 어떤 목사님인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기의 소신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오히려 교회를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과 열망들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에게도 또한 목사로서 이상적인 교회에 대하여 나름대로 기대하는 것이 있고, 성도들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하는 어떤 기준이 있어서, 이것 때문에 사실은 스스로 넘어지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의 생각에 빠져 스스로 낙심하고, 실망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걸려 넘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일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하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간단한 말씀을 통해 교회에 대하여 특별히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를 묘사하는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그리고 성도들에 대하여는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신의 내용은 사실 이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는 분쟁과 당파가 있었고, 음행의 문제가 있었고, 교회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도 있었고, 불신 결혼과 이혼의 문제도 있었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도 있었고, 성찬을 합당하게 행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고, 성령의 은사를 무분별하게 행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까지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 정도 되면 과연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정도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떠나갈 만한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의 지체도 거룩하다
교회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는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고린도교회는 교회도 거룩하여졌고, 교회의 지체들도 거룩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곧 누구의 문제일까요? 성도의 문제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들은 누가 일으킨 것입니까? 성도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말은 성도들이 문제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성도들에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래 전 칼빈의 주석을 통해 자신을 반성한 일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도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때 예민한 젊은이의 시각으로 교회를 보면서, “교회는 왜 이럴까? 교회 장로님들은 왜 이럴까? 교회 목사님은 왜 이럴까? 교회 집사님들은 왜 이럴까?” 하면서 교회를 늘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불평과 원망과 푸념으로 날을 지세우기보다는 교회를 진정으로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해 더욱 기도하고 헌신의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과 너무 다릅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것과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행하셨던 그 사랑과 희생을 본받지 아니하고 내 생각, 내 고집으로 교회를 손가락질하고 원망하면서 교회를 폄하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누구의 문제도 아닌 바로 저의 문제입니다. 제가 가지고 살아왔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에서 목격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거룩해진 교회는 거룩해져야 한다
본 훼퍼는 “교회도 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화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거룩함이라고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상에서 완성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에서 출발하되 성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된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하여진 교회도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여지고, 계속해서 거룩해져 가는 것이 지상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의 모토입니다. 즉 우리는 종교 개혁을 통해 개혁된 교회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았지만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품에 안기는 마지막 순간이 우리의 성화에서 최고 아름다운 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나서 몇 년 동안은 발전하지만, 얼마 후에는 거룩함을 상실하기 시작하고, 죽을 때에는 자기가 최고 거룩했던 순간보다 못한 모습으로 인생을 마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처럼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연세가 높으면 높을수록, 믿음의 연조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더 거룩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늘어가고 거룩함의 실천은 약해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일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의 그 뜨거운 열심과 헌신을 간직한 교회는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교회처럼 70년이 넘은 교회에 대하여 사람들은 “오래된 교회네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들은 계속해서 “오래된 교인들이 많죠?”라고 물어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합니다. 교회 지체들 가운데에는 연약한 사람, 부족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들, 아니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전에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외손자 드와이트 박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곡의 작사자는 교회에 대하여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어릴 때라서 기억은 못 하겠지만 자기가 태어나고 1년 후에 자기 외할아버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23년 목회하던 노쌤튼교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갈 데가 없어서 겨우 스톡브릿지라는 인디안 정착지 마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충격 때문에 더 이상 그 교회를 나가지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 마을에 있는 교회지만 노쌤튼교회를 못 나가고 다른 먼 곳으로 교회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늘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러한 속에서 성장한 이 분이 교회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그렇게 교회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생각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해보자”라고 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교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드와이트 박사는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도 보았고, 그것이 자기 가정의 어려운 문제로 작용하기도 했었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들고 그것을 이겨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교회는 이래야 된다. 교회는 저래야 된다. 성도가 이럴 수 있나?’하면서 불평과 원망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면서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오히려 감사로 중보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불평하지 말라“ 이 말씀이 계속 와서 부딪힙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은 안 했지만 제 속에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불평을 했었던 저의 모습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저는 교회에 대해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이곳에서 만나게 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다함께 가져야 할 자세라고 봅니다. 우리사이에 무슨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런 일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로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성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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