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징조를 구하라(3)_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사 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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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1-04본문
임마누엘의 징조를 구하라(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사 8:9-10)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오늘 본문 말씀은 엄청난 선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것은 엄청난 용기와 능력으로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 대하여 담대하게 외치는 말씀입니다.
유다 왕국은 큰 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하스 왕 시절에 북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연합을 했고 실제로 북이스라엘 나라가 아람 나라의 도움을 받아서 유다 왕국을 침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20만이나 포로로 끌려가는 엄청난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오직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선포했을 때 그들이 그 말씀을 믿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하스 왕은 실제 믿음을 발휘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에게 처절하게 패배를 당하고, 그가 의지했던 앗수르에게 오히려 처절하게 응징을 당하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임마누엘 아기의 징조를 진정으로 의지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이 바로 본문 8절, 9절, 10절의 말씀입니다.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주셨던 임마누엘의 아기의 징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였더라면 북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무너뜨리자”라고 할지라도, 앗수르 나라가 유다 왕국을 침공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물리치셨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징조를 믿었더라면, 오늘 9절과 10절에 있는 말씀을 유다 백성들이 감히 적군을 향해 선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원수들의 모든 계획들, 원수들의 모든 말들, 원수들의 실제 행동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이 놀라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수들을 향해 감히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0절 하반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이는,” 즉 “왜냐하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이것만큼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힘과 능력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한 아기의 탄생으로써 징조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위기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하나를 극복하고 나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고, 하나를 이기고 한숨을 돌릴까 싶으면 또 다른 문제들이 우리의 삶에 찾아옵니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허덕이면서 이것을 넘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가 되었다는 현실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는 삶입니다. 가난이라는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복지가 많이 발전해서 옛날같이 가난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들은 많이 개선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마음이 절망하여 비극적인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세계로 눈을 돌리면 절대적 가난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질병이라는 죽음의 그림자도 항상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질병의 문제는 더욱더 심각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일주일 내내 병원을 찾아다니느라 힘겹기만 합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정도가 아닙니다. 아침에는 여기, 오후에는 저기 이런 식으로 병원에 다니다가 약을 받아오면 이 약이 한 끼 식사 양만큼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거기에다 건강관리를 위해 보약도 먹어야죠, 건강 기능식품도 먹어야죠. 약을 얼마나 많이 드시는지, 그런 속에서 우리는 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날이 추워지면 두려워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많이 걸린다 하면 또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온갖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의 종합세트인 전쟁과 재난이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죽음이에요. 아니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런 위기들이 우리의 인생에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증거
그런데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이 모든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징조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것을 진정으로 믿는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의 삶 속에 임재하시고, 우리의 삶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해마다 성탄절에 각 종교에서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합니다. 저는 그 메시지를 보면서 이것이 덕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늘 마음속에 만족되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평화가 무조건 이 땅에 임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지요. 저는 도대체 성탄절의 메시지는 어떻게 전해져야 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습니다. 성탄이 단지 기념이 아닌,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7장, 나라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임마누엘 아기 탄생의 징조라는 이 말씀을 보게 되었을 때 드디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하스 왕에게 주신 아기 탄생의 징조는 730년 후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아기의 탄생의 징조였지만, 그러나 그 시대를 위한, 즉 그들이 지금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도록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전하게 된다면 우리는 위기를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믿음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발휘하는 것만큼 귀찮은 것이 없습니다. 먼저 믿음을 발휘하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자기의 삶을 개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정말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내어놓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롭게 살기를 결심하는 개혁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단지 믿는다는 입술의 고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진실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개혁하고 우리의 마음의 뜻과 생각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삶의 개혁에 나서지 않는 상황들이 오늘 우리의 입장이 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하스 왕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개혁이 귀찮고, 개혁 자체가 그의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징조를 구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삶의 개혁과 우리 마음의 개혁이 없다면 성탄절은 우리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에는 개혁이 수반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코람 데오는 실제한다
“코람 데오” 라는 말은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코람 데오, 이 한마디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코람 데오를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이라고 해석한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문득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코람 데오를 배울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신 것처럼” 이라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멀리 계신데 이곳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에 실제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신비 체험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함께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편재”는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멀리 계시지만 여기 있는 것처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이것이 코람 데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우리가 애쓰고 힘쓰고 고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느냐?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로 “우리 가운데” “지금” “이곳에” 임하여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바꿔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실제로 함께 하신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함께 게시는 것이 여러분에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의 말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제사 드리는 집에서 자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번은 시골 외갓집에 갔다가 우연히 제사드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부터 음식들을 준비하시는데 무슨 잔치 준비하듯이 준비하셨습니다. 저녁 먹고 일찍 재우시더니 한밤중에 깨웠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옷을 갖춰 입고 방문 열고 나가 툇마루에 서서 무슨 종이를 들고 읽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를 안내해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이것도 드세요. 저것도 드세요” 하면서 수저와 젓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배웅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때 난생 처음 제사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극진하게 행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그런 것일까요? 실제로는 이곳에 안 계시는데 마치 계신 것처럼 우리가 역할극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현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굳게 세워질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2022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연기하거나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히 아기 예수의 탄생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가 되었고, 우리는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한 아기 탄생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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