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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1)_인생의 최고의 목적(시 16:11,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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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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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1)

인생의 최고의 목적(시 16:11, 37: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대주제 아래 새로운 메시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인 '인생의 최고 목적'에 대해 깊이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제1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제일 되는'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순서상의 첫 번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어로 'Chief End'라고 하며, 최고의, 최상의, 혹은 궁극적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수많은 활동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모든 행위가 수렴되어야 할 최종적인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문답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기독교 신앙의 정수와 인간 존재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최고 목적'이 가지는 철학적, 신학적 의미를 살피고, 그것이 우리의 2026년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적 탐구: 아리스토텔레스와 목적 있는 존재

인생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비단 성경만의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가 정리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서두에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에는 각기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운동선수는 운동을 하며, 상인은 장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개별적인 활동들의 목적 위에는 '최종 목적'이 존재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만약 최종 목적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의미 없는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중요한 정의는 "인간은 목적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목적의 유무는 한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듭니다. 목적 없이 표류하는 삶과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그 결과물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 최고 목적을 '행복(Eudaimonia)'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행복은 단순히 감각적인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이성을 최고로 발휘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최고 선(Summum Bonum)에 대한 자각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에서는 이 최고의 목적을 '최고 선(Summum Bonum)'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이는 '가장 좋은 것', '최상의 가치'를 의미합니다. 과거 신학생 시절, 헤르만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책을 접했을 때 저는 두 번 놀랐습니다. 첫째는 이 방대한 교리서가 본래 근로 청소년들을 위해 쓰였다는 서문의 내용 때문이었고, 둘째는 제1장의 제목이 바로 '최고 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그중에서 '최고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분명히 최고 선이 존재하며, 이를 발견하고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야를 새롭게 하는 영적 충격이 됩니다.


행복의 정의와 철학적 관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행복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철학적 관조의 상태로서 인간이 이성을 최고로 발휘하여 세상의 근본 원리를 깊이 묵상하고 깨닫는 이성적 만족의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는 이성적 삶의 실천으로서 깨달은 이성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정의, 공의, 공동체의 선을 이루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말합니다. 이후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은 이를 이어받아 '자연과 덕에 부합하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즉,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를 따르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대답들은 인간의 이성과 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적 변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적 질문이었던 '최고 목적'은 신앙적 대답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을 수용하여 인간의 최고 목적이 행복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자체가 곧 행복"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행복을 위한 도구(수단)가 아니라, 그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참된 행복의 시작입니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이 땅에서의 인간적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지상에서는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최고의 행복은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직접 뵙는 것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신앙의 목적을 내세의 영광과 연결시킨 중요한 통찰이었습니다.


종교개혁과 칼빈의 성경적 답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논의를 완전히 새롭고 성경적인 지평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는 『제네바 요리문답』 제1문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칼빈의 답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철학적 기반이 아닌 성경의 '창조 목적'에 근거한 대답이었습니다. 칼빈 이후로 인생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철학적 유희가 아닌, 실존적인 '신앙의 질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칼빈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나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경건'을 의미합니다. 지식이 마음속에 역사하여 마음을 뜨겁게 불태워야 합니다. 살아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삶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생명력 넘치는 삶 그 자체를 '하나님을 아는 것'이자 '경건'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통합적 선언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으로부터 약 100년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칼빈의 정신을 계승하여 소요리문답 제1문을 완성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최고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함"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요소로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행동이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사실을 두 측면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신앙의 외적 측면(영화롭게 함)은 예배,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모든 삶의 실천들입니다. 신앙의 내적 측면(즐거워함)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영어 원문을 보면 이 관계가 더욱 명확합니다.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여기서 'Him'은 단수이며, 'forever'는 두 동사를 동시에 수식합니다. 즉, 하나님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뗄 수 없는 하나의 목적입니다.


과거 학생 시절, 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을 "공부를 열심히 해서 1등을 하고, 인터뷰에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가 지도했던 학생들도 전국 1등을 해서 하나님 이름을 높이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히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은 사실은, 그러한 성취와 인터뷰는 찰나의 순간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 순간 영광을 돌린다고 말해놓고도 이후에 삶이 변질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된 기준은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이 우리 안의 '기쁨'과 결합될 때, 그것은 일시적인 쇼가 아니라 영원한 삶의 양식이 됩니다. 지상에서 시작된 이 기쁨이 영원으로 이어지기에, 문답은 '영원토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와 연합할 때만 참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최고의 존재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이 피조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자 가치입니다.


존 파이퍼와 '기뻐함으로 영화롭게 함'

현대의 신학자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갈망함(Desiring God)』에서 이 원리를 더욱 명쾌하게 정의했습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and'를 'by'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함 '으로써(by)'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와 일상의 삶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존 파이퍼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의무감이나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을 기쁨의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강력한 통찰입니다. 그는 심지어 삶의 비극과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지를 묵상하며, 이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기쁨의 원리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 곳곳에 이미 명시되어 있습니다.

시편 16편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37편 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우리는 흔히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심정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참된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명하신 것들과 그분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2026년을 새롭게 맞이했습니다. 새해의 새로운 역사는 우리의 새로운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이 질문을 다시 새기시길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세상에서 성공하고 남들보다 잘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진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되, 그분을 온 마음 다해 기뻐함으로써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도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십시오. 일할 때도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하십시오. 고난 중에도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찾으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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