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비전트립의 메시지(3)_라이프치히 : 교황과 공의회의 무오성을 부인함(히 11: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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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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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트립의 메시지(3)

라이프치히 : 교황과 공의회의 무오성을 부인함(히 11:33-38)



비전 트립의 메시지의 중요성

지금 우리는 비전트립의 메시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씀들은 평생 듣지 못한 말씀일 가능성이 크고, 또 진행되는 내용들이 좀 어려운 내용일 수가 있습니다. 조금은 어려워도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것을 계속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어야, 그리고 이런 때에 마음을 기울여 열심히 해야 믿음의 성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깊고 높고 넓고 오묘하다하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마음을 기울이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라이프치히라고 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루터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종교 개혁의 길을 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라이프치히는 현대에는 독일 통일과 연관하여 등장하는 도시입니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열되어 있었을 때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촛불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독일 통일의 물살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마침내 독일이 통일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라이프치히 하면 독일 통일을 위해 기도했던 성 니콜라스 교회, 이렇게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 당대에는 라이프치히에서 가톨릭 측의 요한 에크와 신학 논쟁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 논쟁 이후 루터는 로마 교회를 떠나 종교개혁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논쟁 중에 루터에게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라이프치히 논쟁이 시작되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의 주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요한 에크는 라이프치히에서 논쟁을 개최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의 동료인 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치히를 방문하였고, 플라이센부르크 성(현재의 시청사)에서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크게 5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교황 수위권, 둘째는 자유 의지, 셋째는 선행, 넷째는 연옥, 다섯째는 면죄부 였습니다. 전체 진행은 요한 에크가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에크는 몸도 크고, 목소리도 크고, 대단한 달변가이고, 학식도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칼슈타트는 후에 급진적인 종교 개혁을 주장하고 결국 루터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이 사람은 논쟁에는 약한 사람이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루터가 등장해서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주제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의회의 권위의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결국 루터는 로마 교회와 단절되는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당시 유럽의 최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 게르만족이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 교황은 족장을 왕으로 세우는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황과 왕이 서로 주고받으며 보호하면서 좋은 관계가 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왕의 권세와 교황의 권세 사이에 누가 높으냐 하는 논쟁이 벌어지고 이것이 실질적인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왕은 왕대로 내가 통치하는 영토 내에서는 왕이 최고라고 주장하고, 교황은 교황대로 왕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교황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평행선을 달리게 됩니다. 서로 이기고 지고 하는 동안 세월이 흐르고 루터가 활동하던 시대가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에서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들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루터가 면죄부 문제를 제기하고 성경적으로 증명을 하라고 했을 때 로마 카톨릭 측에서는 ‘교황의 교령이다, 교황의 명령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루터는 계속해서 성경적인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이후 시대에는 교부들이 면죄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지, 그렇다면 증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황의 말 이외에는 성경에서도, 교부들의 저작 속에서도 면죄부에 대하여 증언할 수 있는 근거를 댈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다시 교황의 권위와 공의회의 권위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논쟁을 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교황의 말이라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공의회의 결정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성경적인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 에크는 루터를 후스주의자라고 공격했습니다.


후스에 대한 견해가 바뀌다

후스는 약 100여년 전 콘스탄틴 공의회에서 이단 판정을 받고 화형을 당한 체코의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입니다. 에크가 루터를 향해 ‘너는 후스주의자’라고 한 것은 ‘너는 이단이다’라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루터가 후스주의는 분파주의라고 하면서 자신은 후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얀 후스를 화형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후스를 옹호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루터에 대하여 일관성이 없다고 하면서 공격했습니다. 루터는 에크가 공격할 때 처음에는 후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스는 체코, 즉 보헤미아의 개혁자였습니다. 보헤미아 사람들에게는 민족주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늘 외부의 통치만을 받던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후스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통치자들은 카톨릭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헤미아 지역은 카톨릭 통치자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의 인구가 3분의 2는 전쟁에 죽거나 떠나고 3분의 1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떠난 사람들이 유럽 전역에서 방랑자가 되는데 그 후손들을 집시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 지점에 후스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후스의 사상은 성경 중심주의였습니다. 그는 성찬에 있어서 이종교배(떡과 포도주 모두를 분배하는 것)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성도들에게 떡만 주었습니다(지금도 마찬가지). 로마 교회 측에서는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보헤미아 사람들이 사자를 창 밖으로 집어던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창 밖으로 사자를 집어던지는 것은 이 일에 반대한다는 의사 표시의 방법이었답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로마 교황의 편을 들어 콘스탄틴 공의회에 후스를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안전 보장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후스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구금시키고, 공의회에서는 사형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화형을 시켰습니다. 그때 후스는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거위는 후스라는 말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말을 기억하고 루터를 백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사실 후스에 대하여 깊은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후스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니 부인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후스주의자로 몰리다

후스가 부인 받는 이유는 후스가 사형당한 이후에 후스를 따르던 후스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황제의 군대와 전쟁을 하고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때 이들의 항쟁 중심지가 우리가 이번에 가게 되는 타보르입니다. 타보르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역인데 그들은 그곳에 땅굴을 파고 땅굴 속에서 생활하며 항쟁을 했습니다. 땅굴에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각종 시설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카톨릭 입장에서는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연구해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황제가 거짓말을 하고 공의회가 오류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루터가 ‘나는 후스주의자다’라고 공언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결국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루터가 이제 갈 데까지 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이미 100년 전에 이단으로 낙인 찍혀 화형당한 사람을 따라 자기도 후스주의자라고 말하니 이제는 되돌릴 길이 없다고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논쟁의 증인이었던 게오르크 공작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저주가 그 위에 있기를’ 하며 외쳤다고 합니다. 이제 루터는 저주받은 자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3대 명저

결국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을 통해 로마 교황과 로마 카톨릭과는 함께할 수 없는 종교 개혁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게 됩니다. 이 일 후에 루터는 그의 걸작 3부작 논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첫째 논문은 『독일 귀족에게 고함』입니다. 이 책은 로마 교회의 타락상에 대한 고발입니다. 두 번째 논문은 『교회의 바벨론 유수』 입니다.  『교회의 바벨론 유수』는 로마 교회 의 성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례는 7성례입니다. 로마 교회는 7성례를 가지고 로마의 사제들이 성도들, 즉 교회를 마치 포로로 잡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로마 사제들이 성례를 독점하면서 성도들을 포로처럼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례를 도구로 하여 교회를 포로로 사로잡고 있는 것은 잘못이며, 사실은 모든 성도들이 사제를 통하지 않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사제를 통해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루터는 계속해서 로마 교회의 7성례에 대하여 비성경적인 다섯 가지를 제거하고, 셰례와 성찬 두 가지만 성례로, 그중에서도 성찬은 떡과 포도주 두 개를 다 줘야 하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 책에서 루터는 성도의 참된 믿음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자유자로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로마 교회가 가르치는 성도의 삶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로마 교회와 결별의 길을 가다

결국 루터는 어느덧 로마 교회의 모든 교리나, 혹은 교회 예배나, 그들의 모든 관행들에 대하여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비록 비텐베르크 95개조 논문이기는 하지만, 루터는 그때까지는 아직 로마 교회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 교황의 권위도 인정했습니다. 루터가 로마 교황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라히프치히 논쟁에서부터입니다.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로마 교황의 오류를 지적하고, 공의회의 결정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로마 교회와는 하나가 될 수 없는 길을 본격적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 개혁자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자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오히려 억압하고 핍박하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더 깊이 연구하고 더 깊이 공부하면서, 그 잘못된 것들을 드러내면서, 그는 종교 개혁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루터는 한 걸음 한 걸음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가 처음부터 그곳으로 가겠다고 목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그 길을 가고 보니까 그 자리였던 것입니다. 루터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결국 이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인도받는 길을 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터가 걸어간 길은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과거 역사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난감한, 그리고 부정적인, 혹은 절망적인 모습을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면 인도하시는 대로, 믿음으로 순종하여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를 마침내 이 시대를 섬기는 교회로 세우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비전트립을 진행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인도하심, 즉 하나님의 섭리와 그 손길을 깨닫고 오늘 우리 시대를 위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 모두가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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