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승리하신 그리스도(7)_그리스도의 수고에 대한 보상(사 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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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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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신 그리스도(7)

그리스도의 수고에 대한 보상(사 53:11)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이사야서 53장은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정말 뜻밖인 이유는 이사야서 52장 13절 말씀에서 여호와의 종의 성취와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신 직후에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분도 이것이 정말 뜻밖이고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53장 1절에서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라고 이야기합니다. 52장 13절 말씀을 보면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하고 말씀하였는데 어떻게 이런 영광스러운 분이 믿을 수 없는 모습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을 수 없는 종의 모습을 ‘연한 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연한 순은 새순을 의미합니다. 새순은 아주 부드러워서 손으로 꺾으면 쉽게 꺾입니다. 그래서 봄에 나오는 연한 순을 나물로 먹습니다. 두 번째로 믿을 수 없는 모습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입니다. 마른 땅에서 나왔다는 말은 가뭄 중에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가뭄 중에 식물이 제대로 성장이나 했겠어요? 양분과 수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해 시들시들하기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싫다고 버렸고 외면했습니다. 이렇게 고난받은 모습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 것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는 표현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육체의 아픔과 고통보다 마음을 더 많이 상한 분입니다. 언제 마음을 크게 상합니까? 마음이 크게 상상할 때는 사람들이 배신할 때입니다. 더구나 사랑하던 사람이 배신을 하면 더욱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추종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말씀 한마디에 떠나가는 일을 겪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듣기가 어렵도다’ 하면서 떠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이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에게 와서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인생의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고통당하던 병자들, 맹인들, 앉은뱅이, 중풍병자들, 온갖 불치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 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도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때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에 그들은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제가 학생 시절에 밴허라고 하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 영화 속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그냥 짓눌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주인공 벤허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자기가 노예로 끌려갈 때 자기가 고통스러워하던 순간에 물을 가져다주셨던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물을 한 그릇 가져다가 쓰러진 예수님에게 물을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채찍질해서 쫓아내려 하지만 그는 채찍을 맞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물을 드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저의 마음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현장에 내가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에게 물 한 모금도 드리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물 한 모금 드린 적도 없는 자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다.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 하는 깨달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주간에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분은 왜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는가?

그분이 그와 같은 고통을 겪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치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간고와 질고를 겪으셨고, 찔리고 상하고 고난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난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 때문에 그런 일을 겪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6절,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것인데 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을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혜택은 우리가 받게 하셨습니다.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런데 그 결과 혜택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살리셨을까요? 우리는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할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방식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죗값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죗값을 치른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그냥 죽고 맙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냥 죽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죗값을 치른다면 우리는 죽고 끝나는 겁니다. 영원한 멸망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죗값을 치른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죽어 멸망을 당하겠습니다’ 하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죗값을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죗값을 치르고 살아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복음에 대한 도전

현대인들은, 아니 신학의 역사를 보면 복음이 전파되던 처음부터 복음에 대한 도전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전적 타락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도전이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전적 무능력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던 처음부터 인간 세상에, 아니 복음을 받아들이던 사람들 가운데 이것에 대한 도전이 늘 제기되었습니다. 세 번째 도전은 하나님의 속죄 방법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대속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죄인들의 죄를 속죄, 즉 죗값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속의 방법에 대한 도전이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적 타락, 전적 무능력, 대속의 교리는 오늘날에도 계속적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도전은 항상 원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타락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은 항상 원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아담이 지은 범죄가 우리 모두의 범죄가 되어 우리 모두는 애초부터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타락은 우리 인간의 전 부분에, 어느 한 부분은 선하고 어떤 한 부분은 악한 얼룩덜룩한 상태가 아니라 전체가 다 시커멓게 되었습니다. 이것이게 전적 타락입니다. 전적 타락은 인간성의 전부, 그리고 인류 전체에 걸쳐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부인하는 일들이 기독교 역사 속에 늘 있었습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 즉 인간성의 부패에 대한 도전은 오늘날 로마 카톨릭이 그대로 보존한 신학입니다. 그들은 인간은 모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 타락했다고 가르칩니다. 즉 인간은 영적인 부분은 타락했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정신은 다른 말로 이성입니다.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이 발달하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타락한 부분에서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타락하지 않은 부분에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하지 않은 정신 세계가 맺은 열매, 철학은 타락하지 않은 정신이 만들어낸 선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부인

그들은 인간의 구원도 바로 이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상부 구조인 영적인 구원과 하부 구조에 대한 구원이 있습니다. 영적인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면 하부 구조의 구원은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중 구조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선행, 이중 구조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선행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어 연옥에 가서 부족한 부분을 마저 채워야 천국으로 간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사실은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모토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원죄와 대속의 부인

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이 원죄를 부인합니다. 원죄를 부인하는 다양한 논법이 있습니다. 그중에 초창기에 등장했던 것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즉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신화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화는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으로는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행위 언약이라고 하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혹은 여기 창세기 2장, 3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행위 언약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담이 타락하여 아담의 후손 모두가 죄인이 되는 일을 부인합니다. 또한 인간의 전적 무능력, 인간은 구원 얻기에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에 대한 도전들도 동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살아라 하는 교훈들도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적으로 도전받았던 것 중 하나는  대속의 교리입니다. 대속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주장들이 최고의 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에 대하여 얼마나 방대한 책들이 출판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신기하게도 그 엄청난 분량의 책 속에 대속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는 것이 대속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속을 공격하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대속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그냥 언제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아서 그것을 대속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현대의 도전은 대속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교묘한 사탄의 방법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한 시대가 흐르고 나면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이 교리를 교회와 신학에서 삭제하는 방법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면 삭제되어서 우리 후배들이 보는 책 속에 이런 말씀들은 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복음 그대로 전하고 복음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시대에 복음을 보존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를 우리는 분명히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을 뿐 아니라, 이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그리스도의 영광의 진정한 모습을 나타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고 이곳에서 이 복음의 생명이 충만하여, 새 생명을 얻는 영혼들, 새로운 삶을 얻는 영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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