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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트립의 메시지(7)_취리히 : 또 다른 개혁자 츠빙글리(마 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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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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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트립의 메시지(7)

취리히 : 또 다른 개혁자 츠빙글리(마 6:9-10)


잊혀진 개혁자의 위대한 유산

이번 종교개혁 비전 트립의 일곱 번째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자 ‘잊혀진 개혁자’라 불리는 츠빙글리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츠빙글리는 1484년생으로, 1483년에 태어난 루터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그의 주된 사역지는 스위스 북부의 취리히였는데, 당시 취리히는 베른과 같은 큰 도시는 아니었으며, 베른이 스위스 전체의 주도적인 맹주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칸톤’이라 불리는 자치주들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였으며, 각 칸톤은 독립적인 행정 및 군사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과 관련된 주요 도시로는 베른, 취리히, 바젤, 제네바 등이 있었는데, 특히 바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비롯한 중요한 종교개혁 서적들이 인쇄되어 유럽 전역으로 보급되었던 인쇄의 중심지였습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루터의 독일 종교개혁과 함께 종교개혁의 양대 기둥을 이룹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은 물론 칼빈으로서, 그는 스위스 남서쪽 제네바에서 활동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칼빈과는 별개로 스위스에서 독자적인 종교개혁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는 루터나 칼빈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여겨지곤 합니다. 루터와 칼빈은 한 세대 정도의 차이가 나는데,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약 20년 후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출판되었습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동시대에 스위스에서 개혁을 시작했지만, 그의 사역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는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에, 큰 업적을 남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잊혀진 개혁자’ 또는 ‘무명의 개혁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주의 신앙인들에게 츠빙글리는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인물입니다.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칼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개혁주의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이 신학의 시작은 츠빙글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시작했던 신학과 사상은 칼빈의 그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칼빈이 츠빙글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칼빈은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와 깊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불링거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인 언약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와 불링거로 이어지는 종교개혁 운동과 제네바에서 진행된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은 개혁주의라는 큰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는 칼빈이지만, 츠빙글리를 통해 취리히에서도 이 모든 사상이 선포되고 가르쳐지며 실천되었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위스를 거쳐 북쪽으로 전파된 개혁주의는 네덜란드, 헝가리, 체코 등에 영향을 미치며 마치 ‘낫’ 모양처럼 지역적인 분포를 형성하게 됩니다. 낫의 안쪽이 루터의 영향권이라면, 낫의 날 부분은 개혁주의 신학이 형성된 지역이며, 남부로는 가톨릭 세력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이렇게 유럽의 종교 지도가 그려지는 데 있어 츠빙글리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합니다.


츠빙글리의 핵심 사상

츠빙글리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중심주의)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성경 중심주의입니다. 1529년에 그가 작성한 『67개조 신앙고백』의 핵심은 바로 ‘오직 성경’입니다. 그는 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며, 복음은 오직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교황이나 교부의 말을 인용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 말씀을 가지고 논증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모든 교훈의 중심이며 진리이며, 교회의 직위가 높다고 해서 그들의 말이 성경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으로 여기는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으로)’는 츠빙글리 사상의 분명한 특징입니다. 셋째, 국가와 사회의 개혁에 대한 관심과 노력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종교와 사회가 분리된 시대가 아니었지만,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츠빙글리가 사역했던 교회) 근처에는 츠빙글리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1885년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츠빙글리가 오른손에 성경을 안고 왼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잡고 칼끝이 땅에 닿도록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당시에도 칼을 동상에 넣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이는 ‘말씀의 검과 성령의 검’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국가’와 ‘세상 나라’를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섬겨야 한다는 츠빙글리의 사상이 이 동상에 구현된 것입니다. 그는 사회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모든 개혁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그의 『67개조 고백』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츠빙글리의 죽음은 그의 신앙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그는 당시 가톨릭 지역과의 갈등 속에 발생한 카펠 전투에서 군목으로 참여했다가 전사했습니다. 1차 카펠 전투에서는 개혁주의가 우세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2년 후 2차 카펠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투에서 개혁주의 측이 밀리게 됩니다. 츠빙글리는 부상을 입고 쓰러져 로마 가톨릭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그들은 츠빙글리가 성경적으로 부인했던 고해성사를 이용하여 그를 조롱하며 그에게 죄를 고해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죽는 순간까지 고해성사를 거부하며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고, 결국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고 시신은 네 토막으로 훼손되었습니다.


개혁주의 사상의 원리

츠빙글리가 순교한 나이는 47세였습니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칼빈과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츠빙글리가 죽은 지 5년 후에야 비로소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었으니, 두 위대한 개혁자는 함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또한 츠빙글리는 루터가 사역했던 비텐베르크처럼 독일 전체에 영향을 미친 큰 사건의 중심 인물이라기보다는 작은 도시 취리히에서 사역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작은 인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츠빙글리를 주목하는 이유는, 비록 그의 사역이 작은 도시에서 젊은 나이에 중단되었고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품었던 사상과 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루터를 종교개혁을 시작한 인물로 존경하지만, 그의 신학 사상(루터주의)을 우리의 신학 사상으로 직접적으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츠빙글리의 사상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승한 것은 바로 하나님 영광주의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이 개혁주의 신학의 초점입니다. 이 신학의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신학을 뒷받침하는 것은 오직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삶의 목적이라는 진리는 인간의 사상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가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다음은 사회 개혁입니다. 개혁주의는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살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히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개혁주의 신학 사상의 큰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둘째, 오직 성경으로. 셋째, 변화된 삶을 이 땅에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개혁주의 사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우리끼리만 모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 사상은 츠빙글리와 칼빈을 통해 완성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어 우리가 이 교회와 예배를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의 경우, 하나님의 진노와 죄로부터의 용서와 자유, 구원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뇌속에서 성경 연구를 통해 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영적인 자유를 얻었고, 이는 교회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보름스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된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논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주의를 분명히 했습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독일어 성경을 보급한 것도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사회 개혁적인 측면에서는 깊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던 시기에 비텐베르크의 카를슈타트 교수가 루터 대신 개혁 작업을 주도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1524년 , 1525년에는 농민 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삶 속에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봉기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영주들을 공격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루터는 카를슈타트를 제지하고 농민 봉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파괴가 종교개혁을 무너뜨릴 것이라 판단했고, 이로 인해 루터는 사회 개혁에 더 깊이 관여하지 않는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또한 루터는 처음부터 교황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보다는 로마 교회의 예배 형식 등을 많이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예배와 사회 개혁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가진 개혁주의 신학 사상과는 다소 다른 결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따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오직 성경에 기반을 둡니다. 성경 중심, 말씀 중심의 예배가 바로 개혁주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형상이나 그림을 두지 않으며, 다른 특별한 형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 그 말씀 앞에 굴복하는 말씀의 예배가 우리의 예배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가 시작된 출발점이 바로 츠빙글리였습니다. 우리는 츠빙글리와 칼빈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 사상에 근거한 신학과 교회를 물려받았고, 오늘날 이 교회와 예배를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츠빙글리는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큰 교회나 큰 도시, 큰 나라의 문제를 다루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싹텄던 하나님 제일주의와 성경 중심주의,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개혁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수되어 개혁주의 계열의 교회를 이루게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숨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썩어질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우리끼리만 모여 우리끼리만 좋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법을 개선하고 도덕적,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개혁주의 사상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명한 사람만이 최고는 아닙니다. 큰 교회를 담당한 사람만이 최고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살아 있는가, 성경 말씀의 참된 정신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진리가 살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마음들이 있어 하나님의 영광 제일주의의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츠빙글리를 통해 우리는 크기와 유명세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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