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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한 호소(4)_하늘의 영광을 맛보라 (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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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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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한 호소(4)

하늘의 영광을 맛보라 (히 4:1-11)


성도의 영원한 안식에 대한 묵상

1647년 1월 몹시 추운 겨울, 21세 리차드 박스터 목사는 크롬웰 군대의 종군 목사로 종군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얼마나 병이 심각했는지 그는 다시 살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천국의 소망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그때 그가 묵상했던 것들은 후에 하나의 설교집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4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영광스러운 소망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책의 제목은 『성도의 영원한 안식』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역사 속에서 안식에 대해 이야기한 분들 가운데 이분보다 더 탁월하게 말씀한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 『성도의 영원한 안식』을 읽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리처드 박스터는 이 책에서 성도의 안식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는데 첫 번째로 드는 것이 “은혜의 수단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사로서 헌신을 했을 때 제가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은혜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 이것은 교회를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수단입니다. 저는 이것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존재할 것이며,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성도들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혜의 수단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많은 육신을 벗어버릴 때에도 은혜의 수단이 필요할 것인가? 그때에는 지금과 같이 은혜의 수단이 필요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은혜의 수단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수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원한 것은 은혜뿐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은혜의 수단이 필요 없는 때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수단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는 것만큼 정말 고달픈 삶이 없습니다. 성도들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이 옵니다. 어떤 분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기뻐하고 더 깊고 더 높고 더 넓고 더 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말씀의 교제, 진리의 교통 가운데에서 기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한 귀로 흘려듣고, 어떤 사람들은 한 귀로도 안 듣고, 어떤 사람들은 들었으나 반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들었으나 허망한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되하?” 마치 엘리야가 유대 광야에 이르러 “이제 족하오니 저를 죽여주십시오.”라고 간청했던 것처럼 정말 낙심하고 낙심될 때는 참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럴 때 안식에 대한 리차드 박스터의 정의가 늘 생각납니다. 안식에 들어가면 은혜의 수단이 필요 없다. 그래서 은혜의 수단이 필요 없는 때를 더 간절하게 소망되는 겁니다.


안식이란 무엇인가

안식이란 무엇일까요? 리차드 박스터는 안식에 대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최고로 완성되어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안식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전에 ‘안식은 완성’이라고 하는 글들을 읽은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와서 부딪히지는 않았습니다. 창조의 완성과 구속의 완성이 바로 안식이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것이 마음에 부딪혀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최고로 완성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안식이라고 하는 이 정의는 마음속에 생생하게 깊이깊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안식은 완성이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최고로 완성된 상황입니다. 그때는 영혼과 육체가 변화된 상황입니다. 단순히 죽어서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져서 영혼과 부활한 육체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기를 원했던 온전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에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는 어디 가면 맨 뒤로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가면 제일 뒤로 갑니다. 저는 앞에까지 달려 나가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닙니다. 남들이 다 간 다음에 맨 뒤에 서는 것이 저의 특성인데, 하나님은 그런 저를 하나님의 보좌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얼마나 놀랍겠어요? 저의 특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늘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지겨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다시 없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세상에 다시 없는 즐거움이 되는 때가 그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성도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수단이 필요 없는 때, 저나 여러분에게나 다 복된 때입니다. 저는 그때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완성이다

지금 우리는 1월 한 달 동안 주일성수,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주일성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주일을 안식일이라고도 부릅니다. 현대에 와서는 예배의 날이라고도 부릅니다.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시대에는 유대교의 안식일 개념을 주일에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원리들도 그대로 가져오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율법적인 규정까지도 안식일 준수의 법으로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도 주일은 안식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물론 안식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주일에 적용 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후에 안식하셨는데 이것은 창조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일을 안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안식은 최종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 다윗 왕도 안식이 남아 있다고 이야기를 했고, 사도 바울도 안식이 남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은 역사의 완성과 더불어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기업, 그 기업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은 도대체 그 안식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여러분, 선취(先取)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이루어질 것이지만 지금 미리 맛보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중에 우리가 최종적으로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영혼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우리의 육신은 완성된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완성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완성을 믿고 누립니다. 이것이 선취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라

하나님의 구원은 선취로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선취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최고로 완성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 영원한 안식을 지금 이 땅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맛보는 날로서 우리에게 주신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주일은 계명의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우리에게 무거운 날이 아닙니다. 왜 이 날이 무겁게 느껴질까요? 맛보기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맛을 보았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알 것입니다. 왜 이 날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까요?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맛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평안을 주시고 즐거움을 주시는 겁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영혼들에게는 사죄의 은혜를 주시고, 그의 마음의 자유를 허락해 주시고, 참된 기쁨과 평안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맛본 자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주일을 올바르게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

폴 쥬이트는 『주일의 참 뜻』에서 우리가 주일을 즐겁게 지킬 수 있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네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일을 의지하는 신뢰감을 모두 다 부인하고 죄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키는 자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죄의 은혜와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가 주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주일을 계명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주일을 올바르게 지키기 위하여 내 속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자기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이 부분, 자기 부인으로 이것을 모두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로 말미암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죄의 올무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 그 자유로운 심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주일을 올바로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에게 주일은 계명에 불과합니다.


둘째 이 날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는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키는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입니다. 이것이 주일의 특징입니다. 단지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주일을 지킬 때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이유는 성도의 교제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일에 우리는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셋째 기쁨으로 이 날을 지키는 자만이 올바르게 주일을 지키는 자이다. 주일을 기뻐하고 사모하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을 기뻤했던 사람은 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음 주일까지 너무 멀다. 주일이 빨리 왔으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주일이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려지십니까?


넷째 그 날이 특별히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인정하는 자만이 그날을 올바르게 지킨다. 그날은 주님에게 속한 날,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어떻게 할지는 누구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뜻대로 하는 날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주일을 진정으로 올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주일을 올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주일이 하나님의 날이라고 하는 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간절한 호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그날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죄로부터의 자유,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서로 나누고 그 은혜가 더욱더 창대하게 되는 날입니다. 한 사람과 교제를 나누면 은혜는 배가 될 것이고, 다섯 사람과 은혜를 함께 나누면 은혜는 5배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기쁘고, 주일은 참으로 은혜가 충만한 날입니다. 이것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최고로 완성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복된 삶을 지상에서 맛보는 날입니다. 이 맛을 보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본격적으로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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