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신 그리스도(2)_질고와 간고를 많이 겪으신 그리스도(사 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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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03본문
승리하신 그리스도(2)
질고와 간고를 많이 겪으신 그리스도(사 53:2-3)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동일하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의 적대적인 시대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옛적에도 복음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도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똑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변하지 않고 동일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그리스도는 환영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멸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기대와 달랐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영웅의 기준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든 가난하고 연약하고 신분이 높지도 않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인정받던 적은 없었습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정말 박수 치는 기준은 다양했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사람이 환영받고 인정받고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연약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렇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다 거부하고 아무도 안 믿을 것만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은혜,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복음 전파의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역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현상을 이상하게 생각지 아니하고, 또는 이 시대의 현상을 극복하지 못한 불가능한 장벽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이는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었다는 것과 그 모습을 이기고 복음이 승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며 오늘 이 시대에도 믿음으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는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그분은 질고를 아는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간고는 인간의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아픔과 고통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픔이 가장 잘 표현되는 우리의 감정은 슬픔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A man of sorrow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질고는 인간이 육신의 연약함, 육신의 병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아픔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병과 아픔이 질고입니다. 우리 인간은 질고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아픔 속에 살고 있으며 병으로 신음하고 때로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인생들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알까? 현대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이 인간의 고통을 알까?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까? 현대인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이 인간의 아픔을 공감하여 자기도 아파할까? 아파한다면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현대의 결론입니다. 신은 아파할 수가 없습니다. 아파한다면 신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워한다면 신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린다면 신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높은 초월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인간의 아픔과 고통, 그의 난관과 어려움, 그가 겪는 재난 같은 것들에 마음 쓰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인간이 개미를 보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것은 동일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인간이 개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개미가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개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도 집 안에 개미집을 만들어 놓고 개미를 키우는 사람은 개미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자기와 관계없는 개미들, 산에 가서 만나는 개미들, 화단에서 꽃을 파먹는 개미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자기가 돈을 주고 직접 개미집을 만들고 거기에 개미를 사다 넣고 키우는 사람은 개미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날마다 날마다 들여다보고, 날마다 날마다 개미가 활동을 잘하고 있는지, 먹이는 제대로 먹고 있는지 살피고, 먹이를 늘 공급을 해주고, 먹이 활동과 기타 활동들을 제대로 하는지, 알을 잘 낳아서 키우는지, 그래서 군집이 점점 늘어나는지 관심을 가집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서 그들을 연단시키셨던 분입니다. 다만 타락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삶을 여전히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요?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신 앞에 찾아온 무리들의 상황에 대하여 깊이 공감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헐떡거림, 그들의 육체의 상황, 그들의 삶의 어두움과 절망, 이런 모든 것들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 대해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마음속 깊이 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삶에 대하여, 이 땅의 여러 가지 연약한 환경 속에서 혹은 인간관계 속에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아파하셨습니다. 이것이 A man of Sorrow, ‘슬픔의 사람’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무리들의 배고픔을 깊이 공감하셨던 분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배고픔을 아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광야에서 당신을 따라온 지 이미 사흘이 된 사람들이 먹을 것이 떨어져서 돌아가는 길에 탈진할까 염려하여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모들이 자녀를 상실했을 때의 아픔과 고통을 깊이 공감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부모들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소녀를 일으키셨습니다. 청년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잃은 부모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직면한 죽음의 절망을 함께 슬퍼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절망 속에 빠져드는 일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질고를 아시므로 치유 사역을 하신 그리스도
그분은 질고를 아는 분이었습니다. 질고는 인간의 연약함과 병으로부터 오는 아픔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무슨 병을 앓고 계셨다든지, 무슨 질병에 걸리셨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혹은 옆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성장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그분의 사역 속에 유달리 많이 나타나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병을 고치시는 치유 사역 입니다. 예수께서 고치신 병들 가운데는 정말 심각한 질병들이 참 많았습니다. 죽음을 이르는 치명적인 질병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불치의 질병에 걸린 환자들도 많이 찾아왔습니다. 중풍병자, 앉은뱅이, 맹인, 손 마른 자, 혈루병으로 수없이 많은 세월 고통당한 사람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환자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질고를 아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간고와 질고를 마음속 깊이 안타까워하시면서 간고 속에 있는 사람들, 질고 속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독생자는 인간의 간고와 질고를 겪고 아는 분이었고, 그리하여 간고와 질고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멸시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또 3절 끝에 보면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를 로마 군병들에게 내주었던 것입니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듣자 ‘이 말씀은 듣기가 어렵도다’ 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이 계신 줄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줌의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대단하다고 하는 삶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땅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부자 옆에 있으면 무언가 그에게서 혜택을 받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자는 어떤 사람이 부자입니까? 돈을 안 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부자들은 주머니를 닫고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자에게 기대를 합니다. 부자 옆에 있으면 좋은 일이 일어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부자 때문에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자에게 기대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부자에게 머리 숙이고 알랑거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결코 환영받을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 3절 마지막을 보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3절 하반절에서 그 정체가 드러났는데 ‘우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이 ‘우리’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하였다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다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현상이 옛날 얘기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에서도 진행되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정신으로 돌아가자
여러분은 간고와 질고 속에 있는 인생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그분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분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랑과 충성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시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십자가의 참된 정신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이유는 인간의 간고를 겪어 보았고 질고를 아셨기 때문에, 인간의 간구와 질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셨기 때문에, 인간의 간고와 질고를 없애기 위하여는 그 원인이 되는 죄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죄악된 이 세상을 새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참된 정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다시 세워져야만 합니다. 세상이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변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보혈의 능력이 희박해졌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고 그를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대를 이기고 세상의 불신앙을 이기는 길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해야 할 것이며,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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