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신 그리스도(4)_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사 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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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7본문
승리하신 그리스도(4)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사 53:4-5)
인생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시는 그리스도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가지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묵상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생각을 했던 내용들은 그리스도는 화려한 모습으로, 위대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에도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시대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 때문에 그리스도는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땅에서 인생의 모든 쓴맛을 겪으셨고 인생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알고 계셨으나 그 모든 것들은 실상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시고 알고 계신 분이었고,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는 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의 모든 삶, 자연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무감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비극이 일어나도 그 비극은 그냥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그것에 대하여 신이 가슴 아파하고 그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같이 느끼십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3절). 그분은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분이었습니다. 4절에서 이 단어가 다시 반복되는데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질고’라는 말은 3절에 나오는 ‘질고’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다음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에서 ‘슬픔’으로 번역된 말은 3절에서 ‘간고’로 번역된 말과 원문으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간고와 질고는 인생의 비참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간고와 질고의 핵심 정조, 즉 마음의 감정은 슬픔입니다. 인간들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비참한 것들은 결국은 슬픔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일들은 근본적으로는 슬픔입니다. 그래서 ‘간고’를 ‘슬픔’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아픔과 고통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공감하시는 분에서 더 나아가신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4절과 5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대신 당하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질고를 당하였는데 그분이 당한 질고는 우리의 질고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간고는 우리의 간고였습니다. 또한 4절을 보면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즉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질고를 지고, 우리를 위하여 간고를 겪으신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이 직접 대신 겪으신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이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유대 민족이 여호와의 종으로서 역사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 말씀, 5절 말씀은 도저히 유대 랍비들의 해석을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또한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유대 민족이 고난을 당한 것이 우리 때문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픔과 고통을 당했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생활이 좀 피셨습니까? 유대 민족이 고통당한 것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결국 유대인 랍비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여기 나오는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 유대 민족이라고 해석하면 4절과 5절은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다니엘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된 지 7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기도에는 “하나님, 우리가 또 우리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죄하여 이와 같이 징계를 받으며 저주를 받았나이다”라는 고백이 길게 등장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다니엘서 9장 13절 말씀을 보면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않았나이다.” 다니엘은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깊이 깨달은 것은 이 모든 비극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범죄 때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징계하셨고, 이 저주가 우리에게 임했나이다. 이스라엘이 당한 고난, 이스라엘이 당한 아픔과 고통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은 누구인가?
그러면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은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죄와 비참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고난과 슬픔과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께 범죄였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이 모든 고난은 우리가 받고 당해야 될 것을 대신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어려운 삶을 살다 보면 어려운 삶을 살게 되겠죠.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들을 겪겠죠.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많은 간고를 겪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질고는 질병으로부터 오는 가지가지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도 그리스도께서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어겼습니다. 이 법을 우리는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계약 자체가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계약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과일 나무에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따 먹었습니다. ‘과일 하나 따 먹은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할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마을에 밭이 있으면 밭에 들어가서 뭐 하나 따먹고 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친구들과 논두렁에 심어놓은 콩을 따서 구워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여행을 하다가 과수원 옆 도로에 과일을 놓고 파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요새도 수박 서리, 참외서리 같은 거 많이 합니까?” 그랬더니 “어디요?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놈만 걸려라 하고 있습니다.” 한 놈만 걸리면 1년 농사 수익을 그 녀석한테 몽땅 뒤집어 씌우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바로 남의 포도밭에 들어가서 포도 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밤에 몰래 친구들과 함께 포도를 따라 포도밭에 들어갔더니 포도원에서 개를 풀어놓았습니다. 개가 ‘멍멍’하면서 달려드는데 정신없이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고도 도망쳐 와서 웃으면서 ‘재밌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의 생각으로 볼 때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큰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 그들은 선악과 하나를 따먹은 것이 죽음과 질병과 온갖 불행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약과 법을 무시하는 생각입니다. 계약과 법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하여 그 죄의 결과 인간은 죄와 비참이라고 하는 상황 속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고난과 고통, 불행을 겪으며 이 모든 일로 인하여 절망하며 슬퍼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 속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행복하게 살던 사람도 마지막에는 눈물 흘리며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대하심
그런데 이 모든 죄와 비참을, 간고와 질고를,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우리를 위하여 감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위대함입니다. 그분이 자기의 죄 때문에, 자기의 잘못 때문에 이런 일을 겪었다면 위대한 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에 이 모든 아픔과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위대함이요,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 말씀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분의 위대함은 단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결과 우리가 큰 은혜를 입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5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간고와 질고를 당하였고, 그 결과 우리는 그 은혜를 실질적으로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는 나음을 입었도다. 치유되었다는 것이지요. ‘치유’는 바로 질고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간고와 질고 속에서 눈물 흘려 절망하고 슬퍼하는 인생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고를 겪고, 질고를 겪고, 채찍을 맞으며,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간고와 질고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참한 모습은 사실 우리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비참한 모습이었던 것은 그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우리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그 상한 머리, 상한 얼굴을 통해서, 아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픔과 고통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그에게 얼굴을 돌려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흉하고 아무리 상했다 한들 그것이 바로 나 때문이라면, 그 아픔과 고통과 찢기신 살과 흘린 피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아픔과 고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 가운데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성도들은 이것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한 머리, 못 박히신 손과 발, 그 처참한 모습들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도 주지 않는다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점점 메마르고 죽음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받은 사명을 어찌 감당할지, 자신의 무능력에 슬피 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고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다시 살아나야 교회의 능력이 회복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시 살아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정복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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