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신 그리스도(5)_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사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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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25본문
승리하신 그리스도(5)
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사 53:6)
그리스도께서 간고와 질고를 지시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간고와 질고를 지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라고 말씀합니다. 한편 우리의 죄인 됨을 양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을 볼 때 참 깨끗하고 귀엽고 평화롭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양은 우리 문화 속에서는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반면 염소는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경에서는 양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양은 주로 길을 잃고 헤매고, 목자의 곁을 떠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도 성경이 보는 양의 관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 같아서 그릇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의 어떤 특징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질까요? 양의 시력 때문입니다. 양은 시력이 안 좋아서 멀리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돌봐주지 않으면 한눈 팔다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가다가 양떼와 목자를 찾아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은 시력이 몹시 안 좋아서 멀리 볼 수 없고 자기 앞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의 이런 특징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또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자기 눈앞만 보고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양의 모습들로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것이 성경이 우리 인간의 죄악성, 죄인 됨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인류는 법을 깨뜨린 죄인이다
인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목자를 떠나서 자기 눈앞에 보이는 이득만을 바라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는 멀리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땅에서 잘 되는 것만 생각합니다. 땅에서 조금이라도 편한 것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멀리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 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의 것에만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세상에 집착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영광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뜻도 외면하고,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의 그런 특징이 어디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데 사용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과일을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행위 계약 혹은 행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계약은 법을 말합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계약을 맺으면 그것이 너와 나 사이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이 법을 통해서 유지가 됩니다. 법이 있으면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법이 무너지면 관계도 깨어집니다. 즉 누군가 계약을 깨뜨리면 관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을 깨뜨린 사람에게는 계약을 깨뜨린 그 일에 대해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그런 일이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조항이 있느냐 없느냐는 계약에서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조항이 계약당사자에게 알려졌느냐 알려지지 않았느냐도 정말 중요합니다.
과거 영국에서 한 실험을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사이트에 가입할 때 가입 조건의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까?’ 물어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예스를 누릅니다. 그리고는 그 사이트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자신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가입 조건 제일 밑에,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 곳에 ‘당신의 통장에서 100달러가 인출됩니다’라고 쓰여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습관적으로 예스를 눌렀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것은 사회 행동 조사 같은 일종의 설문조사였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는 손해를 보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계약을 너무나 간단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계약은 법이고 엄격한 것입니다. 계약에 규정이 있고 동의했으면 그대로 시행돼야 합니다. 인간이 죄인이고, 죄인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이 모든 일들은 선악과 하나를 서리를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계약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행위 계약, 혹은 행위 언약이라고 하는 법이 세워졌고, 그 법을 시행하는 동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법이 살아있는 동안에 선악과를 따 먹었고, 그 법에 규정한 대로, 혹은 계약서에 쓰여 있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대표로 하는 모든 그의 후손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 범죄했다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왜 간고를 겪으며, 우리가 왜 질고를 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계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법을 어김으로 우리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유죄 선고가 이루어졌고, 형벌이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아픔과 고통, 질병, 삶의 어려움,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이런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일들을 겪고 있다는 말은 우리 모두가 그 계약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죄악의 길을 걷는 죄인들
계속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다음에는 무어라고 되어 있습니까?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뿔뿔이 흩어져 다 제 마음대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지금 목자와 양 사이에 ‘우리’(fence)라고 하는 계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이 무너지니까 인간을 지켜주고 있던 하나님의 법적 보장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울타리 밖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각기 제 길로 다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각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각자 자기의 욕심대로, 자기의 정욕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각기 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죄악의 길입니다. 우리(fence)를 벗어나서 마음껏 가는데 내 마음대로 가는 그 여정, 이 모든 삶이 바로 죄를 짓는 삶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해서 이야기합니다. 원죄는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을 때의 죄를 가리킵니다. 원죄의 상태에서 태어나는 우리 모두가 각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의 정욕을 따라 자기의 죄를 짓는 자리에 나가게 됩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영어로는 Actual Sin이라고 불러요. Actual Sin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 각자 자기가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범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원죄와 자범죄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하여, 그리고 죄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오게 된 형벌로 인하여 우리는 인생의 모든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과 아픔과 모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문제는 그런 속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그냥 다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다 자연스러운 거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겪는 고통으로 인하여 알 수 있습니다. 아프면 비명을 지르고 슬프면 눈물을 흘립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죽은 자의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는데 그것이 어떻게 자연스러운 것입니까? 또는 ‘있는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요? 인간의 현실을 외면하고 비참한 현실에 대해 눈으로 가리면 다 된 거야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한편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물리학자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사람은 죽으면 다 원자로 돌아가고 남는 것은 원자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을 기념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원자를 기념하는 것일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와, 역시 물리학자라서 다르게 생각하는구나’ 하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보잘것없는 원자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사람이 원자 덩어리라면 이 원자 덩어리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렇게 이름을 가진 원자 덩어리에 대하여 사랑하고, 아끼고 하는 이런 것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개인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것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원자 덩어리라고요? 인간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천재들이 인간을 구원합니까? 박사들이 인간을 구원합니까? 그들은 인간의 삶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타락하되 그의 모든 부분이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 데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그는 어느 한 구석이라도 선하거나 능력 있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이라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는 데 무능력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방법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데 무능력하다 불가능하다 하여 포기하고 버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신 죗값을 치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간구를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슬픔을 감당하셨고, 우리의 죄와 죽음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죗값을 대신 치르신 겁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5절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리하여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일을 대신하는 분을 중보자라고 부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라.“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중보자는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대속물로 우리에게 제시하셨고, 그리스도 자신은 자신을 대속물로 자기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죄사함과 영생의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을 것이며 믿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며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우리의 모두의 죄를 담당하는 중보자로 삼으셨고,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는 증보자로서 자기를 드려 대속의 재물이 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와 같은 대속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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