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13)_언약을 따라 살았던 아브라함(창 15:1-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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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10-16본문
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13)
언약을 따라 살았던 아브라함(창 15:1-9, 17-21)
자료의 한계를 가진 현대 신학
지난주에 우리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고 하는 이 견해가 바울 한 사람의 신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교훈을 균형 있게 제시하지 못한다 하는 사실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 즉 바울 신학에 대한 이야기인데 바울이 가진 신학은 사실 바울의 서신만을 가지고는 전체를 다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사도 바울의 자료는 얼마큼이나 될까요? 우리가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사도 바울의 자료를 최소 14권, 13권 현대에 와서는 그것보다도 더 줄어들었습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의 신학은 서신서만 가지고는 온전하게 구성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부분은 자세하게 말하고 어떤 부분은 희미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신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신학의 전체를 균형있게 제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한 세 관점이라고 할 때 자료의 한계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 견해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이 발전해 온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성경 저자들을 굉장히 수준 떨어지는 인물들로 생각했습니다. 고대의 성경 저자들은 단순히 흩어져 있는 고대 문서들을 취합했는데 현대의 편집자와 같은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취합한 실력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저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을 볼 때 얼마나 전근대적인 사람으로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주장들이 등장합니다. 성경 저자들이 그렇게 후진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 저자들도 생각 있는 사람들이다. 즉 성경은 성경 저자들의 생각과 의도에 따라서 제대로 편집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누가의 신학, 바울의 신학 등의 이름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누구의 신학, 누구누구의 신학, 신명기 신학, 역대기 신학, 이런 식으로 책별로, 저자별로 신학 사상을 연구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성경 전부를 다루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부를 다루지 않게 되면서 일어난 문제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는 사도 바울에 대하여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이 생긴 것입니다. 마치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언약에 대한 관점이 너무나 빈약하다
제가 지금 언약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현대 신학은 특별히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고 하는 신학 경향은 자료의 양이 절대적으로 적습니다. 그 범위와 양이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그리고 이 제한적인 자료를 보강하기 위하여 1세기 유대교라 사상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자기들도 말하기를 자신이 말하는 1세기 유대교가 실제 1세기 유대교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학문적으로 자기의 뒷문을 열어놓고 도망갈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웠지만 그래도 그 풀(pool)이 편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친 계시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어느 특정 시대만을 딱 끊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역사 속에 하나님이 언약을 어떻게 계시하셨는지 계시의 역사, 언약 계시의 역사를 살피지 않고,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 유일한 언약인 것처럼 말하는 새 관점주의자 모습은 너무나 무모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언약이 그들이 말하는 그것밖에 없을 수 있습니까? 이미 여러분에게 행위 언약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언약이란 단순히 약속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 언약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과 자손의 약속
아브라함의 삶에서 언약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열망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열망했던 것, 아브라함의 생애에 걸쳐 나타난 아브라함의 열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세계 만민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아브라함은 유독 자손의 약속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손의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에 대한 약속은 자기가 직접 가나안 땅을 밟고 다니면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그 땅을 상속받을 자손이 없었습니다. 자손이 있어야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것인데 자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자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이 애간장이 타도록 자식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아브라함이 언약의 핵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언약의 핵심은 자손입니다. 그런데 자손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는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한 아들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도 실제로 아들 하나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아들을 더 많이 낳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항상 언약을 상속할 아들 하나를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상속할 아들 하나의 언약이 이삭에게, 야곱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와서 자손들로 진행됩니다. 야곱의 자손은 12명이고, 12명의 아들을 통하여 12지파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아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는 자손들이 됩니다. 그리고 자손들이 땅을 상속받아 약속의 땅에서 한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을 세우게 되는데 이 왕에게 다시 아들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사무엘하 7장 12절,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 아들의 약속을 주십니다. 영원한 왕위를 이어갈 왕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보면 또 한 아기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을 보면 임마누엘의 징조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장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 예수 탄생을 일릴 때 이 귀절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초점이 맞춰져 있는 계시는 한 아들입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한 아들. 한 아기의 탄생 그런데 그는 신비한 아들입니다. 이 아들은 일반적인 아들이 아닙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이 아기는 왕이신데 신적인 존재로서 나타나 있습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이 한 아기는 왕이다 그리고 이 아기는 신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이 성취됨으로 신약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자손과 땅의 약속은 하나님 나라의 약속
한 명의 아기, 한 명의 아들에 대한, 성경의 역사 전부에 계속 나타나고 있는 이 계시는 처음 창세기 3장 15절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는 여인의 후손의 약속이 있습니다. 한 아기에 대한 약속입니다. 다음은 아브라함의 씨로, 그 다음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사야서에서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아기가, 그 다음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돋아나는 한 싹으로 계속해서 한 아기의 계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아기의 계시와 함께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너와 네 자손과 땅”에 대해 약속하고 있습니다. 너와 네 자손과 땅이 나중에 많은 자손과 땅으로, 계속해서 왕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다윗의 씨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왕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한 자손과 많은 자손으로 분화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자손과 땅이 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곳에서 왕이 세워지지만 이 왕은 영원한 왕을 기다립니다. 이 영원한 왕은 바로 아브라함의 씨 하나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씨 하나가 누구였습니까?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와 같이 성경은 시종일관 한 아들에 대하여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계시의 역사성입니다.
성경 계시의 역사상
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지극히 편협하고 자료가 적다고 하는지 여러분은 지금 제 설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계시의 전체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주시는 계시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연결을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제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과 땅이 합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이 일을 알지 못하면 모세 언약의 특징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과 땅의 약속이 만나 시내산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이 아브라함의 언약 아래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시내산 언약을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손과 땅이 하나님 나라의 계시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언약으로 흘러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깨뜨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결국 언약의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나라를 회복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깨어지고 멸망한 다윗의 왕국이 지상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 다윗의 왕국이 멸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된 나라는 다시 다윗의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현대 신학의 한계
제가 지금 계시의 역사성에 대해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 현대 신학에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의 대학들이 학문성을 엄격하게 다루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모든 대학에서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하여 신학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학문의 세계에서 퇴출당하지 않기 위하여 이제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원리들을 외면하고 말하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위 학문 속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계시의 역사성을 말해서는 안 되고, 학문성을 버리고 나오게 되면 학문의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들과 우리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계를 알지 못한 채 학문적 주장들을 마치 새로운 진리인 양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현대 신학은 대학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의 대원칙들을 버려야 했고, 학문성이라고 하는 것들을 받아들여 변신을 해야 했습니다. 얼마 전 후배 교수 한 사람을 만났는데 제가 알던 학과가 교수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학과의 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학이 살기 위하여 과를 계속 바꾸는 바람에 1 2 3 4학년이 다 같은 과라고 하지만 과 명칭이 다 다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학과 명칭이 매년 바뀐 것입니다. 비슷하게 현대 신학도 살기 위해 정체성을 변경시키는 일들을 벌써 오랜 세월 진행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학적 주장들을 진리로 믿고 따른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언약에 비해 볼 때 지극히 나이브하고 지극히 편협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편협되고 제한적인 언약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그의 주장들은 제대로 될 수가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럽고 엄청난 언약을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신학의 비애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참 진리가 제대로 선포되고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시대입니다. 명성만 높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모두 진리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명성 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지나가서도 안 됩니다. 분별할 것을 분별하고 세워야 할 것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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