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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위한 투쟁(1)_해밀턴 선교사의 생애와 사상(행 2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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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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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위한 투쟁(1)

해밀턴 선교사의 생애와 사상(행 28:30-31)


교회 창립 75주년을 맞이하여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75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를 설립하신 해밀턴 선교사님은 1890년 4월 3일에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9월 2일에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뉴욕 인근 바타비아라고 하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고, 대학은 코넬 대학을 다니다가 알라바마에 있는 워세터 칼리지를 졸업했습니다. 그후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 해에 결혼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20년에 우리 나라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리고 1926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Th. M.)를 했습니다.  해밀톤 선교사는 구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들이 축출 당하기 전 학교를 졸업한 구 프리스톤 계열의 신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은사들이 교단과 신학교에서 축출당하고 새롭게 정통 장로교를 세웠을 때 그 교단에서 만든 선교부로 자기의 소속을 옮기게 됩니다. 결국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왔지만 1936년 독립 선교부라고 하는 정통 장로교 선교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사참배의 압박을 받은 장로교가 총회에서 신사 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의하는 비극적인 현장에서 해밀턴 선교사는 이에 반대하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 나가고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됩니다. 1940년에는 추방을 당해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1941년부터 43년까지 미국에서 몇 개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4년부터 47년까지 교단 기독교 교육위원회 총무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난 다음에 어느 날 가족들을 모인 자라에서 한국으로 다시 선교하러 가야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5월 18일 마침내 부산항으로 독립한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습니다. 그는 부산에서 고려신학교에서 강의를 담당하고 먼저 입국하여 사역 중이던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정착하고 동대신동에서 적산 가옥을 빌려 그곳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1층은 홀을 가진 공간이었고 2층은 방들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대신동으로 옮겨 이곳에서 6.25 때 양정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자재 협조를 받아 미국식 목조 건물로 하얗게 색칠된 교회당을 짓게 되었는데 이 교회당이 수십 년 동안 우리 교회 교회당이 되었던 것입니다. 해밀턴 선교사님이 우리 나라에 다시 돌어온 때는 한국 나이로 60세 되었던 때입니다. 1년 후에 6.25가 일어났고 전쟁 도중에 미군 당국에 의해 추방을 당하게 됐습니다. 이 분이 추방을 당하게 된 이유는 평양에서 가르쳤던 제자에게 통장을 넘겨줬다가 그만 환차익을 노린 범죄로 수사를 받고 결국은 추방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6.25 당시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상황인데 목자를 잃어버리면서 상당히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설립자 해밀턴 선교사의 생애

해밀턴 선교사는 신학적으로 진리의 투쟁에 자기의 생애를 바쳤던 분입니다. 이분의 생애를 보면 그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일제하에서 신사 참배의 탄압에 항거하고 추방당하고 일도 겪었고, 신학적으로는 미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운동, 미국 사회에 퍼져가던 과학적 사고, 진화론의 확산 등과의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에는 미국의 신학이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양 진영으로 서로 대립하던 때였습니다. 근본주의 진영은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유주의는 현대 과학의 발전, 과학적인 학문, 과학적 사고방식 등으로 무장하고 성경의 내용 가운데 과학적으로 어긋나는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근본주의자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결국 메이첸이라든지 코넬리우스 반틸이라든지 하는 이런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교단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해밀턴 선교사는 추방당한 계열에 있었습니다. 이분이 낸 첫 번째 저서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The Basis of Christian Faith) 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기독교 신앙의 현대적 변호』(Modern Defence of Christian Faith) 입니다. 이 책은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와서 당시 젊은이들이 성경에 대해 의심하는 현실을 보고 재대로 가르칠 교재가 필요하다고 하여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집필하는 동안 한국어로 번역 작업을 번역하지만 번역자가 미숙하여 결국 영어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책을 집필하는 동안 진화론에 대한 사상적인 전향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되 진화가 일어나는 과정도 하나님의 창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진화론을 수용한 창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생물학을 공부한 어떤 선교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분이 해밀턴 선교사에게 강하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말을 듣고 진지하게 진화론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결론 내리기를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진화론의 기초』라는 책도 쓰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지키고자 투쟁

오늘 우리는 이분이 자기 시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진리를 지키고자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과학적 사고에 대하여,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을 과학이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신학을 과학에서 밀어내는 풍토 속에서, 그리고 이 사상이 일반인들에게 확산되는 시대 속에서, 온몸으로 투쟁을 한 분이었습니다. 해밀턴 선교사의 첫 책이 나오기 2년 전 1925년에는 미국에서 소위 원숭이 재판이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싸움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반론이 있었고 이로 인해 재판이 열렸는데 결과는 창조론을 주장하는 측의 패배였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이분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통해서 진화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또한 『진화론의 기초』를 다시 준비해서 출판했습니다. 현대 사상과의 투쟁, 이것이 그분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사역이 된 것입니다. 그는 선교지에서는 우상숭배와 투쟁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전제적 독재 수단으로 내세운 것이 신사 참배입니다. 각급 학교 관공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침마다 모든 국민들이 동쪽 해 떠오르는 쪽을 향하여 고개 숙여 절하는 일들을 행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는 성경 구절들을 먹으로 다 지우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분은 온몸으로 투쟁을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추방당했던 선교지에 다시 와 사역을 하고 그때 우리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참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분은 순수한 분이었는데 제자에게 이용당하고 결국은 전쟁 와중에 추방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면서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지켜주시고 오늘까지 이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져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시대의 도전이 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해밀턴 선교사님과 같은 시대적 도전, 그에 대한 우리의 응전이 남아 있다 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평안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앞으로 한 세대 후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아마 격동의 시대라고 표현을 할 것입니다. 6.25는 전쟁이니까 당연히 격동의 시대겠지요. 또 4.19이며 5.16도 역사의 격변기겠지요. 70년대의 유신이며, 제5공화국 모두 역사적인 격변이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도 역사적인 격변기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세계관 사상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지금 아주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같은 것이 첨예한 전선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이냐에 대해 아직 일치된 합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앞으로도 교회 내에서 일치를 위해 많은 토론과 노력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전선은 동일하게 인식하나 이 전쟁을 드론으로 할 것이냐, 탱크로 할 것이냐, 소총을 들고 나갈 것이냐 하는 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효과적인 방식들이 시급헤게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난 주일에 10월 27일 서울에서 큰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회는 뉴스를 전혀 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뉴스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이슈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한국교회의 ‘몽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이것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완전히 외면당하고 뉴스에서 한 꼭지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은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하여 뭔가 지혜로운 어떤 대책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전선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이 전선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할 것이냐의 문제는 이렇게 1차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좀 더 지혜로운 방식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로 기억될 우리 기대

현재 우리는 다양한 면에서 격변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한 세대 후에는 우리들이 지금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 현실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 후에 지금 우리의 선택이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인데 아마도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한 세대 후까지 살아있지 못하겠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앞으로 한 세대 후까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책임 있는 위치에서 한 세대 후 우리 조국 교회의 모습을 지금 우리들이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 우리에게 지금 그 책임이 주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사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한 세대 후에는 지금을 역사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후세의 사람들이 평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하느냐?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우리 교회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 하는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누가 감히 정답이라고 채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최대한 생각하고 기도하고 용기를 내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그곳에서 선택하고 용기 있게 나가야 될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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