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1)_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이유(행 20:32)

페이지 정보

작성일2024-07-30

본문

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1)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이유(행 20:32)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기도

사도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면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육지에 상륙해서 에베소교회를 방문하기보다는 에베소교회에 통지하여 교회를 섬기는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하여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사역과 삶에 대한 자신의 원칙, 또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3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기억하고 본받으라 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32절 말씀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교회를 부탁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좀 특이합니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신다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들이 다 알고 믿는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는 것에 대하여는 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어그러진 말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는 항상 시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대비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9절 말씀을 보면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도는 분명히 자신의 시대를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시대를 살피고, 시대의 흐름과 장차 나타날 현상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에베소 교회에게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너희 가운데 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다. 양떼를 아끼지 않는 그들이 하는 일은 결국 무엇입니까?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양떼를 잡아 먹고 교회가 무너지게 하는 사나운 이리들이 올 것입니다. 그 사나운 이리들은 나타나서 무조건 적대적으로 협박하는 방식으로만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은 협박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친절하게 잘해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해도 잘해주기 때문에 다 용납하고 따라갑니다. 이것이 앞으로 여러분에게 찾아올 현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타날 현상에 대한 경고,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가 사역하던 기간 내내 했던 일입니다. 디모데 목사에게도 디모데전서에서나 디모데후서에서나 계속해서 때를 분별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대의 본질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본질은 반드시 복음을 변개 시키고 진리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깨뜨리려고 한다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세대”의 본질

로마서 12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대”라는 것이 바로 시대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본질을 이 세대라고 부릅니다. “이 세대”는 성경이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와 하나님께서 완성시킬 새로운 시대를 구별하는 용어입니다. 이 세대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 현실을 의미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왜냐하면 이 세대의 본질 때문입니다. 이 세대의 본질은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 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렇게 말씀하셨더냐?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대의 출발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부터입니다. 그때 이 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문자들을 바꿔놓고 의미들을 변개 시키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役事)를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탄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아니하다가 결국은 범죄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의 역사가 계속되어 오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어떤 존재의 뜻에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대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세대를 믿지 않습니다.


대배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사람들은 역사의 발전을 믿었습니다. 18세기 들어서서 사람들은 역사의 발전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과거 시대보다 지금 시대가 더 발전한 시대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과거 자기들의 조상과 선배들보다 훨씬 더 계몽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발전을 믿었습니다. 장차 아주 아름다운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시대를 유토피아라고 불렀습니다. 앞으로 유토피아라고 부르는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향하여 발전해 나아가는 인간들은 정말 탁월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그 사람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대”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대배교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대한민국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 기독교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로마 시대와 같은 박해는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전제 군주가 자의적으로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행하거나, 또는 독재자가 그렇게 행하는 시대가 이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대배교가 어느 곳에선가는 이루어질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은 대배교를 믿습니다. 이제는 로마 시대와 같은 박해 때문에 배교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의 어떤 일로 인해서 배교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일까요? 그것은 탁란의 방식입니다. 새 중에는 알을 낳기만 하고 자신의 알을 품고 부화시켜 새끼를 키우는 일을 안 하는 새가 있습니다. 새끼를 열심히 키우는 다른 새가 알을 낳으면 그 둥지에 자기 알을 낳습니다. 그러면 엉뚱한 어미 새가 남의 새끼를 열심히 먹여 키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학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는 신학적인 방면에서, 다른 하나는 목회적인 방면에서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방면에서 이미 우리는 한 번 이런 일들을 겪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수십 년 전부터 들었던 용어입니다. 과거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교회는 신학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0세기 들어 미국 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에게 밀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신학교에서 모두 쫓겨났습니다. 총회로부터 면직을 당하고 신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아주 탁월한 신학자들, 코넬리우스 반틸이라든지, 그레샴 메이천이라든지, 혹은 게할더스 보스라든지 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개혁주의자들입니다마는, 그러나 그분들이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직에서 해임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총회 자체가 이미 자유주의 신학으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그때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했던 졸업생들 가운데 이분들과 같은 계열에 있었던 분 가운데 한 분이 우리 교회를 세운 해밀턴 선교사님입니다. 해밀턴 선교사님은 조선 땅에서 일제시대에 신사 참배에 반대하다가 결국은 추방을 당해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교회 사역과 총회 총무의 사역을 마치고 해방된 대한민국에 다시 와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에 대해 알려면 우리 교회 설립자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설립자가 어떤 계열에 있었던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신학이 바뀌면 교회가 통째로 바뀔 수 있습니다.


목회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두 번째 방향은 목회의 영역입니다. 성경적으로 입증되고 역사적으로 검증하여 오늘까지 진행해 온 목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시대가 변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모두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꾼다면 무엇으로 바꿀까요? 먼저 그들은 상징, 이미지 같은 것들을 바꿉니다. 우리 교회에는 사실 상징이나 이미지가 없습니다. 강단에는 십자가조차 없습니다. 본당 정면에 십자가가 있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임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예배 현장에 두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십자가가 우상숭배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 십자가를 보면서 사람들은 예배와 십자가를 연결시키는 잘못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 현장에는 그림도 전혀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위 성화라고 부르는 그림들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 현장이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왜 이것을 경계할까요? 상징, 혹은 이미지들은 자꾸 보고 사용하는 동안 그것을 어디에서 보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배 현장에 무엇을 두었느냐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정말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교회가 변화해야 한다 하면서 이런 각종 상징과 이미지들을 무분별하게 교회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징과 이미지들이 실상은 우리의 믿음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들로부터 추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언가 그럴듯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을 모두 동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모두 용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서 지금 흘러가고 있습니다.


은혜의 말씀이 역사해야

사도가 시대를 내다보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와 그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오니.” 사도가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은혜의 말씀이 역사해야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아니면 분별과 대응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이 살아 역사하면 거짓된 것들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하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시대를 분별하고 주님께만 맡긴다고 했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습니다.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오니.” 은혜의 말씀이 역사해야 성도들이 보호를 받고 교회가 모든 대적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의 말씀은 역사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은 바로 이 은혜의 말씀의 역사입니다. 은혜의 말씀의 역사가 배교의 길을 가는 교회를 되돌린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은 교회와 성도를 지킵니다. 그래서 사도가 주님께 기도할 때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