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12)_언약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규정한다(창 1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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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10-10본문
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12)
언약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규정한다(창 13:14-17)
폭이 좁은 언약 이해
지난 주일에 우리는 새 관점주의자인 톰 라이트가 언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언약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폭이 좁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서신서만을, 또 바울의 서신서 중에서도 바울의 책이다 인정받는 책들만을 자료로 바울의 신학을 정리했기 때문에 폭이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신학을 연구하면서 바울에게만 한정 짓는 현대의 신학 방법론은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그렇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 방법입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성경을 저자별로 세분화해서 그의 책에 나와 있는 내용만으로 신학을 구성하는 이런 성경신학 방법이 대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전부를 말하는 신학이나 신구약 성경 전부를 말하는 신학은 과거의 신학으로 다 몰아붙이고 현재 와서는 아주 좁은 분야만 연구하는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편집 비평이 등장한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편집 비평이란 저자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 책을 썼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연구자들은 한 책이 있으면 그 책은 저자의 온전한 몫이 아니라 그냥 수없이 많은 저자들의 자료를 수집해 모아놓았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조각조각 내어 이 부분의 저자는 누구인지, 저 부분의 저자는 누구인지 말하면서 하나의 책을 수많은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런 연구에 한계를 느끼고 성경 한 권 한 권의 저자는 단지 자료를 모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해 나갔기 때문에 온전한 저자의 신학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신학이 편협하게 되다
이 방법론의 문제는 책 한 권을 가지고 저자의 세계 전부를 말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주장 톰 라이트도 바울 서신만을, 그중에서도 바울 서신이라고 다 같이 동의하는 책들만을 근거로 바울 서신 신학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신학의 모든 내용을 균형 있게 소유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편지를 쓸 때에는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를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문제되는 것들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는 그의 신학 전부를 균형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한계를 채우기 위하여, 부족한 부분들을 어디서 채울 것이냐 하는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19세기 20세기 초의 신학자들은 부족한 부분을 고대 근동의 자료들로 채웠습니다. 즉 바벨론이라든지 앗수르라든지 성경 역사에 관계된 나라와 민족들의 각종 자료들, 책들, 고고학 발굴들, 특별히 그들의 언어들을 그 연구의 중요한 분야로 삼고 그 연구 성과를 반영했던 것입니다. 결국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 나라와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온전한 신학을 전부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은 자세하게 말하고, 어떤 것은 한 마디로, 어떤 것은 암시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을 말할 때 다른 자료를 가지고 채워 넣어서 완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받은 성경 해석의 원리는 “성경은 성경으로”였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의 신학은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빠진 DNA를 어디로부터 채워 넣는가? 보통 핮자들은 자기가 전공한 것을 가지고 채워 넣습니다. 고대 근동 언어 가운데 아카드 어를 연구했다면 바벨론 자료를 가지고 채워 넣습니다. 아람 어를 전공했다면 아람 어를 가지고 비어있는 자리를 채워 넣습니다. 헬라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다면 헬라 철학과 문학으로 채워 넣습니다. 동일하게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약에 대하여 성경 전부를 보는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냥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는데, 유대인의 국가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어쨌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켰으니 약속을 지킨 하나님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킨 하나님이 믿는 자를 의롭다라고 인정해 주신다 말합니다. 그는 언약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다”라고 약속한 것이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 외의 언약을 한 번 더 말한다면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사라와 하갈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죄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 세상을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그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치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 땅에 와서 이 사명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언약의 전부입니다.
다양한 언약과 계시의 점진성
성경을 보면 그것만이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그것보다 훨씬 많고, 아니 성경 자체가 언약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가 하나님의 언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을 언약으로 계시하시고, 그 언약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 속에 후에 이루실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의 계시를 씨앗으로 심어놓으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씨앗이 조금 더 싹이 트고, 이 싹이 조금 더 성장하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그 씨앗이 활짝 꽃이 피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가 구체적으로 점점 구체화되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많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2장에는 행위 언약이 등장합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행위 언약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소망하면서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가 약속을 끝까지 붙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우리한테 하나님이 주신 계약의 전부가 아닌 계약을 파기하게 된 사건과 연관되어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시지만 또한 하나의 약속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복음, 즉 원시적 형태로 주신 복음이라고 합니다. 원복음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 아담과 세우신 새로운 언약이었습니다. 이것은 새 언약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마음속에 이 창세기 3장 15절 말씀, 원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갔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임하는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간입니다. 언약은 마음속에 소망을 줘요. 그래서 이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언약이 그 사람의 삶을 규정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규정한다
여러분,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 백성의 삶을 규정한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3장 말씀은 아브라함이 롯과 분가하고 난 다음, 롯을 떠나보내고 롯이 떠나간 곳을 멀리 바라보는 아브라함이 허전한 마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은 아마도 롯이 떠나간 곳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염없이 그쪽 방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롯은 하란 땅에서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함께했던 조카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이 조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조카가 떠났습니다. 허전한 마음으로 조카의 뒤를 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조카의 뒤를 볼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보라. 네 눈에 보이는 땅을 네게 주겠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땅과 자손의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두루 다녀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마음에 품고 약속의 땅을 종과 횡으로 다녔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100년 동안 밟고 다니는 삶이 시작된 겁니다. 왜? 그 땅을 밟고 다녔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을 밟고 다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약속을 따라 자손에 대한 소망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땅과 자손이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을 밟고 다녔던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자신이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은 양을 치면서 푸른 풀밭을 찾아 이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동이 그들의 숙명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바로 이 이동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이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동의 삶은 양(羊) 때문에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언약을 붙들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라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니는 동안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점점 구체적으로 잡아가는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손의 약속이었습니다.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진데 네 자손의 숫자도 세리라.” 자손이 아주 많을 것이라는 말씀인데 막상 그에게는 자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너와 네 자손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저에게는 자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은 자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식 제물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7절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그러면서 땅과 자손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이 땅을 애굽 땅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을 새겼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불로 태워 언약식을 거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땅과 자손의 약속을 하시면서 확실하게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평생 동안 이 약속을 붙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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