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순종하라(1)_순종의 탁월성 (삼상 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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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2-25본문
기쁨으로 순종하라(1)
순종의 탁월성 (삼상 15:22-24)
순종은 성경의 대주제
오늘부터는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기쁨으로 순종하라” 입니다. 순종은 제가 오랫동안 설교하고 싶었던 주제였습니다. 여러 해 전에 순종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검토했었던 자료들은 순종에 대하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넘어서는데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또한 제가 생각하는 성경의 대주제로서의 순종에 대하여 제대로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단하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순종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순종하라” 하면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복종하라” 는 말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오히려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면 말씀을 전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순종에 대한 이 부정적 이미지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순종에 대하여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큰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순종에 대하여 정말 엄청난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성경의 대주제로서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아쉬움입니다.
순종은 성경의 대주제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순종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거대한 주제입니다. 성경 어디를 펼쳐도 순종을 말하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제가 언약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은 어느 언약이든 순종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행위 언약만 순종을 요구한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그 배움을 따라 행위 언약만 순종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저 또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언약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연구하고 고민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어느 언약이든 순종 없이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도 순종을 말씀하고, 시내 산 언약도 순종을 말씀하고, 다윗의 언약도 순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도 순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새 언약을 말할 때 믿음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새 언약에 대한 교훈에는 언제나 믿음과 더불어 순종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새 언약을 말하면서 순종을 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종을 말하면 믿음을 죽이는 것처럼, 믿음의 도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순종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언약은 없습니다. 모든 언약이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 전체가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한편 성경을 보면 순종을 요구할 때에는 축복을 겸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과 축복은 항상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주었던 순종의 언약인 행위 언약도 항상 생명, 즉 영생을 축복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순종과 축복이 함께 제시되었고, 시내 산 언약도 순종과 축복이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순종을 기억해야 합니다. 순종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당연히 가져야 하는 자세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당연히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당연한 일에 대해 축복을 선물로 약속하셔서 우리의 순종을 더욱더 격려하시고 권면하셨습니다.
순종의 탁월성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순종의 탁월성에 대한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입니다. 이 말을 오늘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순종이 예배보다 낫고, 찬양이 예배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보다 탁월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것은 예배를 세우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만큼 예배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보다 더 탁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예배는 정말 소중한 것이고, 예배는 정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교회법에는 예배 방해 행위에 대해 현장에서 즉결 처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예배는 교회 안에서 아주 탁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순종이 예배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순종이 예배보다 더 탁월하다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과연 예배보다 더 탁월한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부분적 선택적 순종의 잘못
본문의 배경은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쟁 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과 전쟁을 명령하시면서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소유를 남김없이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아말렉과 싸웠던 유명한 전쟁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을 하러 나가고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팔이 아파 손이 내려오니 이스라엘 백성이 패배하고 손을 드니 승리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옆에서 아론과 홀이 모세의 팔을 붙잡아 올려서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손을 들고 있었고 결국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벌써 몇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아말렉 족속에 대하여 그때 승리하게 하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 때에 그 심판을 사울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 길을 가로막았으니 이제 그들을 쳐서 진멸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소유를 남김없이 진멸하라”(삼상 15:3). 그런데 오늘 9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무엘이 와서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확인하니 사울 왕이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청종은 순종과 동일한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청종으로 번역할 때도 있고 순종으로 번역할 때도 있는데 동일한 말입니다. 이 말은 “듣는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말씀을 듣고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습니다.” 여기서 진멸은 누구를 진멸한 거예요? 소유를 진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진멸했습니다. 사람 중에서도 왕은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21절 말씀을 보면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 제사하려고 진멸하지 않고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려고,” 그러면 모든 것이 용납될까요? “예배드리려고 한 건데”, 그러나 지금 무엇 중에서 가지고 온 겁니까? “진멸할 것 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즉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선택적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잘못된 기준 ;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유익
백성들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의 기준은 자기의 유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순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신 것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드리면, 예배드리기 위해서라고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그 뒤에 있는 것은 백성들과 자신의 유익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탈취물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였지만 속에는 자신들의 더러운 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 왕 아각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를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왕을 잡아 자기 앞에 무릎을 꿇리고, 자신의 권세와 영광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예배를 핑계로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을 아름답게 포장한 것에 대해서 사무엘이 했던 말씀이 바로 22절의 말씀이었던 겁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예배와 거룩함으로 포장해도 소용 없다
사무엘의 대답은 매우 엄중하고 무서웠습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전하는 죄와 같으니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왜냐하면 순종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선택적 순종을 용인하고 넘어가면 사람들은 자기의 의도와 동기와 더러운 욕망을 항상 거룩한 것으로 포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덮고, 하나님의 뜻으로 덮고, 예배로 덮고, 선교로 덮으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겉에 포장된 포장지를 보지 아니하시고 그 속에 있는 그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제서야 사울이 자기의 속마음을 내어놓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24절).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백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조차도 사실은 정직한 말이 아닙니다. 일부 진실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백성은 군사들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탈취물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면 군사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당연한 도리로 백성들의 요구나 불만들을 진정시켜야 하는 것이 왕이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거기에 자기의 몫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욕심들을 지금 백성들을 두려워함이라고 하는 말로 또다시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여러 가지 변명으로 포장하고 포장하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아무리 거룩하고 좋은 것으로 포장을 해도 진실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진실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로 포장하면 안 될까요? 거룩함으로 포장하면 안 될까요? 교회가 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역으로 포장하면 안 될까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예배 아닐까요? 그러나 예배를 예배 되게 하기 위하여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예배 되게 하기 위한 진실됨이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예배를 위하여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고 다스리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습득해야 하는 덕목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대주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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