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5)_예배의 타락은 하나님 백성의 타락(사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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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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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5) 

예배의 타락은 하나님 백성의 타락(사 1:11-15)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배가 무너지는 역사

오늘은 예배하는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여 예배가 무너지는 역사를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가나안 땅을 통치할 하나의 나라로 조직화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민족과의 전쟁을 통해 군대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정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을 세우지 않고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신정 국가체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왕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삶에 집착하면서 결국 이민족들에게 통치를 받는 불행한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민족의 압제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께 블,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자를 보내셨는데, 사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끝에 백성의 장로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찾아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뜻대로 인간 왕을 세워 이스라엘 열왕들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열왕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위임된 통치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왕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하와 종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열왕들은 대부분 끊임없이 이방 나라 왕과 같이 되기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방 왕들을 닮아가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 나라처럼 변해가게 되었습니다. 때론 선한 왕이 있었지만 선한 왕의 영향력은 제한적이고 악한 왕이 들어서면 악한 왕의 악한 일은 쉽게 전파되는 특징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점점 상실해 갔던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우상숭배가 들어오다

참된 예배가 정착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사 시대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시대 말 엘리 제사장의 모습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신실하게 지켰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느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일종의 미신과 같이, 혹은 기복주의와 같이 변해 버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족속과 전쟁하다 패배하니까 법궤를 가져오라 하고, 법궤가 오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소리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블레셋 족속들도 그들의 함성 소리를 듣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을 시작하니 이스라엘은 소리만 질렀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법궤를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족속을 치시므로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이내 법궤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무서워하여 산속에 쳐 박아놓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집안은 몰살을 당하였고, 이제는 법궤를 책임지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엘리 제사장의 뒤를 이었지만, 그는 백성들을 달래고 통합하는 일에 힘쓰느라 법궤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 왕도 법궤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 나라를 안정시키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겨우 법궤에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지만 법궤를 모실 수 있는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법궤를 안치할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일평생 전쟁만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성전을 짓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진행했던 것이 전쟁 범죄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피 흘리고 사람을 죽인 일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전을 짓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는지. 그러나 솔로몬 왕은 결혼을 통하여 이민족들을 자신의 아내로 삼아 평화를 이루었지만, 그러나 이민족 아내들이 가지고 온 우상들을 인정하고 우상들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 나가면서 우상 숭배의 풍조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악습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는 지혜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에 미친 악한 행동은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 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결국 나라는 두 토막으로 분열하게 되었고, 북쪽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변질시켜 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되었고, 그들은 결국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왕의 통치의 한계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 남 유다왕국의 상황은 겉으로만 보면 굉장히 좋은 시대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던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는데, 웃시야 왕이 죽던 해로 따지면 한 100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네 명의 왕이 들어섰는데 네 명의 왕이 다 신앙이 인정된 왕이었습니다. 요아스 왕은 8살에 왕이 되어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지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루어 가는 영적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 왕인 아마샤 왕도 역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인 웃시야 왕도 역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웃시야 왕의 아들 요담 왕도 역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4대 약 100년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들이 세워졌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시야 왕 같은 경우에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또 웃시야 왕은 제사당 대신 자신이 하나님께 분향을 하려다가 문둥병으로 심판을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기본적인 자세는 분명했던 왕들이었고, 선한 왕이 4대에 걸쳐 일어난 일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100년의 세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담 왕의 아들 아하스 왕은 극도로 악한 우상 숭배자요, 온갖 미신들을 섬기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4대에 걸쳐 선한 왕이 세워졌는데, 왜 그 100년의 세월 동안 백성들은 변하지 않았을까요? 왕의 믿음과 백성들의 믿음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요점입니다. 왕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겨도 백성들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왕들과 백성들의 믿음이 동일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항상 정치적으로, 즉 통치자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4대에 걸친 왕이 100년 동안 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백성들은 자기 살기 바쁘고, 자기 삶에 집착하면서,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우상숭배와 기회주의와 편리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악한 왕이 들어서면 그 악한 왕이 끼친 악영향은 백성들에게 쉽게 퍼지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참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향하여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 말씀은 굉장히 슬픈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에 무슨 귀가 있습니까?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향하여 내 말을 들으라,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 백성들이 얼마나 귀가 멀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적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죽하면 귀도 없고 마음도 없는 존재를 끌어들여 이 말씀을 하셔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소나 나귀가 무슨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그런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귀와 소를 끌어들여야 할 정도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듣지도 않고 마음도 주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다음 4절 첫 번째 단어는 “슬프다”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모습을 오늘 본문 11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무수한 재물이라고 했으니 하나님 앞에 재물을 많이 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제물을 많이 드렸습니다.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즉 하나님 앞에 재물을 드리는 자,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단지 재물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예배자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않고 그 자리에 와 있는 것만으로는 예배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자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린 재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헛된 것, 즉 빈 껍데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기름이 풍부하고 아무리 대단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예배자의 진심이 없으면 헛된 재물일 뿐입니다.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분향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맡으는 향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향을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배자가 아닌 자가 이것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 즉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 성회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그때는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일상의 모든 삶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모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되지 않고 예배 행위를 행하는 것을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결과적으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 그들의 간구를 듣지 않으시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고 우리를 통해 예배의 영광을 나타내어 만민이 예배하는 집을 세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되 이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얼마나 필요할지 예측을 하고 이 일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시대를 이기는 힘은 참 예배에서 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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