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7)_죄를 용서하사 예배로 부르시는 하나님(시 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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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6-18본문
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7)
죄를 용서하사 예배로 부르시는 하나님(시 130:1-8)
깊은 곳 절망의 곳에서 부르짖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0편은 참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6절의 말씀 늘 마음속에 깊이 다가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 이것을 군대 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군대에 가서 보초를 서는데 정말 시간이 안 갑니다. 한번은 제가 이등병 때에 새벽 2시 근무를 나갔는데 보초를 서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느낌이 뭔가 이상해서 번쩍하고 눈을 뜨니 저는 서서 자고 있었고 바로 눈앞에 순찰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후방에서 군 생활을 해서 2시간씩 근무를 서면 됐습니다. 그런데 대학생 때 전방 체험을 했는데 휴전선 철책 근무자들은 보통 11시간을 서더라고요. 그때 이 시편의 6절 말씀이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지금 모엇을 더 기다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 기다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절,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인은 지금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깊은 곳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시인은 주변을 둘러보아도 도와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도움과 나의 구원이 되시는 바로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웅덩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바닷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절망은 더 깊고 낙심은 더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구원을 기다리는 마음은 점점 더 간절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절망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깊은 곳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까요? 3절 말씀을 보면 이 절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다시 말씀 드리면 이 깊은 곳은 인간적인 고난이나 혹은 우리의 삶의 환란이나 이런 것보다는 영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시인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가진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은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본래 죄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함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사탄의 궤계에 빠져 그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죽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비참한 상황 속에 빠졌는데, 그는 더 이상 인간관계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지만 형이 동생을 해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형제 사이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경쟁 관계가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예외적인 일이 될 만큼 인간은 근본적으로 깨어지고 무너진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하시고 한마디 더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나 남편은 너를 다스릴지니라.”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지 다스린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저는 이것이 늘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사모한다”는 말은 사자가 먹이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말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는 때에 사용됩니다. “죄가 네 앞에서 너를 노리고 엎드려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하신 말씀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던 사랑의 관계가 아닌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타락한 인생의 비참한 삶
타락한 인생은 정말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는 가운데 경쟁하고, 다투고, 서로 앞서기 위하여, 서로 위에 올라서기 위하여, 혹은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하여 끊임없이 경쟁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개인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부족 간의 관계에서도,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도 수없이 많은 전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 서구의 지성인들은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절망했습니다. 문명인인 자신들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행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후에 지식인들이 대학에 돌아와서 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는데,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은 전선에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총을 쏘고 대포를 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세기는 병든 영혼들의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병든 영혼들이 역사를 만들어 간 것이 바로 20세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병든 영혼들이 만들어 간 역사는 비참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에 자기들은 소망을 가지고 밝고 아름다운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시키고 도덕을 증진시키면 이 세상은 밝고 아름답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을 가진 자신들이 총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는데, 인류 역사 속에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중엽에는 절망적인 철학과 사상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믿을 것이 하나도 없다. 과거부터 믿어왔던 철학도 믿을 수 없다. 과거에 우리가 확신했었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난도질했습니다. 그것이 20세기 후반의 서양 사상의 모습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것이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경의 원리를 따라 가르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미 사회에서 배우고 학습한 사고방식이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배운 사고방식은 과거에 옳다고 여겼고 바르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기존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현대 사회의 주된 사상입니다. 그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을 보여줍니다.
죄 많은 인간의 절망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찾아온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배의 불평등 같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사람은 잘 살지만 어떤 사람은 못 사는 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절망하고, 어떤 사람들은 원한을 품고,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갑작스럽게 험악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평소에는 참 착한 사람이었어요.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잔인한 일을 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죄악의 문제가 깊은 병으로 우리 인간 사회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은 참 무섭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인하여 겪는 불행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중병에 걸리면 자녀들이 얼마나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요. 아이들의 삶이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환경이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나이가 들면 병원 다니는 것이 매일 매일의 일과입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노년의 불행은 수명은 늘어났는데 병으로 앓고 사는 세월이 더 길어진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지금 평균 15년인가 병으로 앓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평균 수명은 늘었지만 삶의 많은 날을 병상에 누워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많은 인간의 절망입니다.
또 다른 깊은 곳 영적 침체
그러나 시인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절망적인 것들을 지금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기의 문제로 절망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존 오웬은 그의 시편 130편 강해에서 깊은 곳을 그리스도인의 영적 침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어느 날 침체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고, 예배를 기다리는 마음도 없고, 찬송을 부르나 기쁨이 없고, 기도는 메말라 버렸고, 과거에 그가 은혜 가운데 살던 삶을 생각하면 지금 나의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깊은 영적 침체, 그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 바로 이것이 깊은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깊은 곳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 도대체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인간이 죄악된 존재로서 갖고 있는 많은 문제와 절망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도대체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또한 이것이 영적 침체의 깊이라면 그 절망적인 영적 침체 속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그리고 그 모든 일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지금 시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즉 인간의 절대적인 문제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문제이든지 근원에는 바로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비극의 근원은 인간이 정죄받은 데 있습니다. 그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은 것으로부터 이 모든 비극들이 찾아왔고, 인간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절망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갈등 때문에, 시험 때문에, 혹은 기쁨이 없는 메마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고 어떻게 하면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 찾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죄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회복의 길은 하나님의 용서
그 속에서 회복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사유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인이 되었고 죄의 심판과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 모든 죗값을 대신 치르시는 분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죗값을 치러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중보자이심을, 내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분이심을 믿는 자, 그는 그 모든 죄의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받은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목적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게 하기 위하여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 또한 이와 같은 범죄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회복이 됩니다. 영적 침체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그의 교만과 불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교만과 불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예배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오늘 드리는 예배가 용서와 회복의 예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즐거움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예배의 즐거움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 예배가 힘들고 어려울까요? 우리에게 바로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그 사유의 하나님의 선언, 죄 용서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 용서의 체험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보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그가 더 사모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말씀, 사죄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마음껏 기쁨으로 경배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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