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9)_참 예배의 최전선에 서라(딤후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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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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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9)

참 예배의 최전선에 서라(딤후 1:13-14)


진리에 붙들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이번 2주일 동안 다녀온 종교개혁 역사 투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루터가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황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술했던 최후 진술 중 한마디 말씀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이 말은 제가 처음 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이었고, 또 역사 강의를 하면서 늘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의미가 저에게 새삼스레 다가온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루터는 스스로 종교 개혁을 의도한 바가 없었고, 결국 로마 카톨릭과 결별한 개신교를 만들려고 하는 꿈과 비전을 가진 바도 없었고, 그는 단지 로마 교회로부터 강제로 축출 당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황제가 소집한 회의에 소환을 당했는데 아무도 그가 그곳에 가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05년 전에 이미 얀 후스가 황제의 안전 보장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화형을 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곳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황제와 교황의 사절단과 제후들 앞에서 최후 진술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이 말은 “진리에 이끌려 여기 서 있나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진리에 붙잡혔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고 이렇게 진술합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정복당해 있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속박당해 있습니다.” 이 말은 진리가 나를 정복했고 진리가 내 양심을 붙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 진리를 철회하기 위해서 루터가 제시한 조건은 이렇습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해, 또는 명백한 논증에 의해 논박되지 않는 한,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정복당해 있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속박당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사람을 정복하지 않았더라면, 진리가 그의 양심을 붙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진작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미 교황으로부터 파문장이 와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 파문장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것은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진리가 그 사람을 붙들었고, 진리가 그 사람의 양심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누구보다 충실한 로마 카톨릭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제시했던 그 어떠한 수행을 통해서도 감동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의 양심을 속박하고 있는 것일까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에 이끌리는 삶의 출발점에서

저에게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는 말은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역사성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고 하며 자신이 처한 역사적인 자리를 인식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리가 우리를 이끌어 진리 때문에 여기에 와 있다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역사적 사명에 대해서, 더 나아가 교회의 시대적 사명에 대해 기도할 때, 이미 우리는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적 사명, 이것은 교회가 각 시대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역사 현실과 관련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시대적 사명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을 시대적 사명이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용어 정리를 했습니다. 교회에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그 사명은 역사적인 사명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명은 특별히 시대적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회의 사명이 있고, 교회의 사명은 역사적 사명이며, 각 시대의 교회에게는 자신들이 직면하는 역사 현실 속에서 증명해야 되는 특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 증명해야 되는 부분들이 역사 속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우리만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만의 역사적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시대적 사명이라 특화해서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대적 사명은 참된 예배

우리 시대의 시대적 사명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 시대의 시대적 사명은 참 예배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한 사람의 영혼과 그의 양심을 장악하고 속박하고 이끌어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인도하였다면, 그 진리는 앞으로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가겠습니까? 진리는 그 사람을, 또는 그 교회를 어디로 이끌어 갈까요? 진리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까지 진리가 최고 최종 목적지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보수하고 진리를 전하는, 그야말로 진리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진리 그것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배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학문적이라거나, 혹은 논리적이라거나, 또는 그 어떤 게임과 같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는 이유는 참 예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참 예배자로 사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제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이 사역했던 생피에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기둥에 강단이 붙어 있었습니다. 강단 앞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저는 마치 칼빈의 설교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참으로 귀중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칼빈이 설교할 때 설교자도 좋았겠지만 그 설교를 듣고 진리에 감동받아 진리에 따라 사는 성도가 진정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청중이 없으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는 될 수 있습니다. 청중이 없으면. 물론 그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청중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진리에 정복당한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그 양심을 속박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와 청중들이 다같이 아름다운 교회, 이것이 진정으로 지상에서 아름다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와 청중들이 다같이 진리에 정복당해 있고 진리에 속박당해 있어 하나님 앞에서 함께 참 예배를 드리는 영광스러운 교회, 이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받은 시대적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함께 나아갑시다

루터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면 항상 이사야 선지자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부르짖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그 현장까지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출발점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루터가 진리에 속박되고 그 양심이 진리에 붙들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고 말했다면, 나는 이제 출발점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발걸음을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과 함께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자료수집을 위해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히려고 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있어야 제가 보여주면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남이 찍은 사진은 교육 자료가 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찍으세요 찍어줄게요.” 그래서 몇 커트를 찍긴 찍었습니다. 제가 자꾸 제 사진을 안 찍으려고 피하니까 사람들은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곳, 아주 멋진 곳을 볼 때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곳에 오면 좋겠다. 제가 느끼는 것들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내년에 우리 중고청연합 비전 트립을 생각하면서 그곳에 있을 우리 중고청 다음 세대 우리 자녀들을 생각했습니다. 내년에 이 비전 트립이 잘 되어서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이 일을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직면하게 될 역사 현실에 대한 교훈

오늘 제가 디모데후서 1장 13절 14절의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시대적 사명에 대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목사가 직면하고 있는 역사 현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왜 복음과 함께입니까? 복음이 내 마음을 장악하고, 복음이 나의 생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고난이 복음을 부인하게 할 수 없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13절에서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바른 말”은 사도 바울에게 배운 진리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배운 진리의 말씀을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두 번째로 14절에서는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르쳤던 진리를 “바른 말”이라고 표현하고, 두 번째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진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진리의 아름다움을 지켜라. 그다음 3장으로 가면 “너는 이것을 알라”라고 말하면서 말세에 대하여 교훈을 했습니다. 즉 앞으로 사도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 목사가 직면하게 될 역사 현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역사 현실에 대하여 교훈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역사 현실을 이기는 길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우리의 양심을 붙들어 우리의 삶을 진리로 살아가도록 하고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스러운 예배로 인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 그 가운데 서도록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디모데 목사만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대비하는 참된 자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 예배를 위하여 진리를 지키는 것임을 깨닫고 진리 앞에 나아가고 진리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예배하는 자리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참 예배를 세우는 참된 교회, 참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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