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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6)_기뻐하시는 하나님(시 1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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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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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6)

기뻐하시는 하나님(시 104:31)



신앙 성장의 본질: 신론(神論)의 확장과 심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종종 사역의 경험이 많아지거나 종교적인 지식이 축적되는 것을 성숙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의 성장은 우리 내면의 '신론(神論)'이 성장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신론이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은 단순히 학문적인 정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생명력 있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지식이 날로 자라나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사로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마음의 뜻이 되고, 삶을 이끌어가는 요동치지 않는 원리가 되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 영혼의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신앙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이러한 성장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론을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통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우리 영혼의 토양에 심겨집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과 손길을 직접 체험할 때, 말씀은 더욱 밝게 빛나며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말씀과 삶의 체험이 선순환을 이루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속에서 장성해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최고의 영적 특권입니다.


전통적 신론의 틀을 넘어선 새로운 시각

우리는 보통 교리적인 틀 안에서 하나님을 배웁니다. 전통적인 신론의 체계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 거룩하신 분, 무한하신 분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속성들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요리문답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그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무한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우리 신앙의 뼈대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하지만 반드시 회복해야 할 또 다른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혹은 '행복하신 하나님'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전의 교리적 용어들이 하나님을 다소 정적이고 차가운 존재로 느끼게 했다면, '기쁨'과 '행복'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열정과 뜨거운 마음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와 통치 사역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누리시는 역동적인 인격체이십니다. 우리가 이 '행복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때, 비로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은 의무를 넘어선 환희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가 엿본 하나님의 행복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행복과 기쁨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오래된 주제였습니다. 신학의 체계가 정립되던 시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지성적 작업은 신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신의 존재를 진술하며 "신은 행복하다"라는 명제를 던졌습니다. 그는 신이 최고의 행복, 즉 '지복(至福)'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대개 육체적인 감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식 여행이나 시각적인 즐거움처럼, 인간의 기쁨은 주로 육체의 감각 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찰나의 만족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육신이 없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행복을 누리실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사유(思惟)함'으로 행복하신 분이라고 통찰했습니다. 최고의 존재가 가장 고귀한 대상인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관조할 때, 거기서 가장 완벽하고 영원한 행복이 발생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훗날 헨리 스쿠걸이나 존 파이퍼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헨리 스쿠걸은 "한 존재의 탁월함은 그 존재가 기뻐하는 대상의 탁월함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가장 기뻐하시고 사유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심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적 사유만으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결코 결핍된 상태에 계신 분이 아니라 당신의 영광 안에서 스스로 충만하고 행복하신 분이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시사해 줍니다.


하나님의 자기 사랑과 성자의 영광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높이시고 영광을 취하시는 것을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자아도취는 부족한 존재가 자신을 과시하려는 허영이지만,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진리와 존재의 본질에 근거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가장 아름다우시고 가장 위대하신 분이기에, 그분이 당신 자신을 가장 사랑하시는 것은 우주의 가장 정당한 질서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성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아들 안에서 발견하고 기뻐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이유는 그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시는 그 신성한 사랑과 기쁨이 우리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기 기쁨과 사랑의 물줄기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흘러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거대한 행복의 파도 속에 우리가 함께 휩쓸려 들어갔음을 뜻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창조 세계에 투영된 하나님의 만족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 얼마나 큰 즐거움을 누리시는지를 반복해서 노래합니다. 그 첫 번째 장이 바로 '창조'입니다. 시편 135편 6절은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혹은 의무감으로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셔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깊은 만족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인격적인 고백입니다. 여기서 '좋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설계와 의도가 피조물 속에 티 없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을 가르시며, 생명을 채우실 때마다 그 창조물 속에 깃든 당신의 지혜를 바라보며 무한한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누리신 '안식'은 피곤한 육체를 쉬게 하는 휴식이 아니라, 완성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며 누리신 충만한 즐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시편 104편 31절의 고백처럼, 여호와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신 행사로 말미암아 스스로 즐거워하십니다. 이 거대한 우주의 운행과 생명의 보존, 그리고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하나가 그분에게는 영원한 영광이자 끊이지 않는 즐거움의 제목이 됩니다.


죄인의 구원: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기쁨

하나님의 행복이 우리에게 가장 감격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은 바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오는 것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기뻐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존재가 멸망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했다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향해 단 한 마디의 질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잔치를 베푼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산을 헤매는 목자의 심정, 그 양을 찾았을 때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이는 목자의 기쁨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신명기 10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셔서 그 후손인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기뻐하셨고, 우리가 그분 앞에 엎드릴 때 즐거워하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그 아픈 사역조차도, 우리를 얻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백성의 회복과 절기 속에 감추어진 기쁨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과 같은 절기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지키는 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당신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신 '기쁨의 축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거둔 수확을 보고 기뻐하시며, 그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시키시고 함께 즐거워하셨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인상을 쓰거나 감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존재 자체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해 노래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하나님의 기쁨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더 이상 두려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해 주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 영혼에는 참된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기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어떤 기대를 품고 있습니까? 많은 성도가 하나님을 늘 노여워하시는 분, 우리가 조금만 잘못해도 매를 들고 기다리시는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라고 일관되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선택하실 때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자기 백성 삼으실 때 즐거워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정성껏 드리는 예배를 보시며 하나님은 미소 짓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딘가에 방문할 때 나를 진심으로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환희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히 행복하신 분이며 그 행복을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구원의 모든 사역을 통해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즐거움으로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여러분의 힘이 되고, 하나님의 행복이 여러분 삶의 이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할 때, 하나님은 우리 삶을 통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기쁨의 물결이 오늘 여러분의 삶의 모든 현장 위에,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충만하게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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