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8)_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벧전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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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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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8)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벧전 1:8-9)



그리스도인의 기쁨, 그 독특한 성격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베드로전서 1장 8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 중에서도 가장 크고 놀라운 기쁨,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에 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은 결코 부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그리스도인에게나 있어야 하는,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일반적인 정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가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한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말하는 막연한 긍정주의나 자기 최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기쁘다, 즐겁다"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심리적 암시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철저히 객관적인 근거,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기쁨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논쟁: 예외인가, 일반인가?

20세기의 위대한 강해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목사님은 그의 저서 『성령 세례(Joy Unspeakable)』에서 바로 이 베드로전서 1장 8절을 주제 본문으로 삼아 중요한 논쟁을 던집니다. 그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극소수의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예외적인 사건인가, 아니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할 보편적인 상태인가?" 로이드 존스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두 가지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경험만으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특정 성경 구절을 오직 자신의 체험을 정당화하는 도구로만 사용하는 교만입니다. 둘째는 '경험 없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체험도, 신령한 감각도 없이 성경을 단순히 문법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만 분석하는 지성적 활동에 불과합니다. 이런 식의 읽기에는 영혼을 흔드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한 이 기쁨은 무엇일까요? 로이드 존스는 이 기쁨이 당시 소아시아 전역(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 전체'에게 일반적이었다고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특정한 영적 거인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 흩어진 평범한 나그네들을 향해 "너희가" 기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표현을 생소하게 느끼고 "우리 교회에서 저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일까?"라고 찾아 헤매야 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너무나 메말라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은 그들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실제적인 능력이었으며, 보지 못한 예수를 사랑하게 만드는 강력한 실재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새로운 감각(New Sense)': 영혼의 센서등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역시 그의 명저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이 본문을 주제 성구로 삼았습니다. 에드워즈는 거듭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며 '새로운 감각(New Sense)'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현대적인 비유로 '센서등'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두운 복도에 들어서면 센서가 움직임을 감지하여 순식간에 불을 밝히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죄인인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인지할 수 있는 '영적 센서'를 장착시켜 주십니다. 본래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감각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창조 세계 곳곳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우상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시는 영혼은 이제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그분의 탁월함, 그분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뉴 센서(New Sense)'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강력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는 즉시 그분을 향한 '사랑'과 '기쁨'이 솟구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감정의 본질입니다. 내가 억지로 짜내는 감정이 아니라, 내 영혼의 센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했기에 터져 나오는 반응입니다. 이 센서가 살아있는 성도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동일하게 미워하게 됩니다.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내 영혼의 센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찬란한 빛에 반응하여 켜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과 사랑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토록 큰 기쁨을 누려야 하는가? 그 이유는 복음의 현장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의 센서를 작동시키시고, 그 센서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철학자들이 말하는 무미건조한 사유의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토록 서로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행복하신 하나님'입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며 성부를 '사랑하시는 분', 성자를 '사랑받는 분', 성령을 '그 사랑 자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말씀은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 영원한 과거로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무한한 사랑의 교제와 기쁨이 있었다는 사실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혼자 고립되어 계셨던 분이 아니라, 삼위의 완벽한 연합 안에서 극상의 행복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바로 이 하나님의 원형적인 행복에 초대받은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 하늘에서는 동일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에서 당신의 아들을 가장 사랑하시고, 그분으로 인해 가장 큰 기쁨을 얻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도덕적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집약된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사역의 현장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잠언 8장은 지혜(그리스도)가 창조의 곁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아버지가 행하시는 거대한 창조의 일을 아들이 곁에서 함께 기뻐하며 돕는 장면, 그 인격적인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행복은 더욱 충만하게 빛났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 사건은 아들의 '순종'이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아들은 가장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꺼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육신이라는 초라한 옷을 입고, 십자가에서 죄덩어리가 되어 죽임을 당하는 그 처참한 자리까지 나아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직 아버지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계획을 지지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아들을 보며 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행복에 동참하는 자,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느끼시는 그 무한한 사랑과 기쁨과 행복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즐거움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손주를 보며 온 가족이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엄격하던 할아버지도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 무장해제되어 함께 웃고 박수칩니다. 아이를 중심으로 온 집안에 기쁨이 가득 찹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며 무한히 기뻐하신다면, 그 아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우리 역시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대상을 우리도 함께 바라보며, 하나님의 기쁨에 전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주파수에 우리의 영혼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가 이 기쁨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 안에서 누리는 그 근원적인 기쁨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길 원하십니다. 17장에서도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중보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내가 만들어내는 내 몫의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쁨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행복이 내 영혼을 점유한 상태입니다.


영혼의 센서를 닦으라: 기쁨의 회복을 위한 결단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조하고, 예배가 의무로 느껴지며, 기쁨의 샘이 말라 있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영혼에 장착된 '뉴 센서(New Sense)'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화장실의 센서등도 렌즈에 습기가 차거나, 먼지가 내려앉거나, 기름때가 코팅되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감각도 세상의 염려와 정욕, 죄의 먼지들로 덮여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이 우리 앞에 선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센서가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란 우리 영혼의 센서에 낀 때를 벗겨내는 작업입니다. 세상에 빼앗겼던 마음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금 복음의 본질 앞에 서서, 하나님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의 센서를 다시 깨끗하게 닦아주실 것입니다.


결론: 기쁨으로 증명되는 신앙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성숙은 단순히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가로 증명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넘쳐나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보지 못한 예수를 위해 생명까지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참지 못할 만큼 큰 기쁨에 압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감옥 안에서도, 사자 굴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있는 센서를 다시 가동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지식, 즉 그분의 본심과 그분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대로 임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이 자리를 나설 때, 여러분의 얼굴에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 영광스러운 광채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행복이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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