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사망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승리(5)_구원의 역사와 믿음의 사람들(히 11:17-19)

페이지 정보

작성일2026-05-08

본문

사망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승리(5)

구원의 역사와 믿음의 사람들(히 11:17-19)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적 실현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 곧 영원한 과거인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에 대해 함께 깊이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이 거룩한 사역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께서 당황하시며 급하게 마련하신 '플랜 B'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를 어쩔 수 없이 불쌍히 여기셔서 마지못해 결정하신 일도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무한하신 사랑 안에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신 완벽한 작정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며, 그분의 모든 행동 뒤에는 영원한 목적과 치밀한 계획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원대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그 계획이 실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계획이 존재합니다. 어떤 이들은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한 화려한 청사진을 그립니다. 그 계획들을 들어보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하고 박수가 절로 나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계획이라도 실행될 능력이 없거나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 종이 위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은 한낱 공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무리 영광스러운 계획을 세우셨다 할지라도, 그것이 죄로 가득 찬 이 땅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성취되어야만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인류의 피할 수 없는 현실: "죽었더라"의 반복

성경은 증언합니다. 아담이 타락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았던 그 비극적인 순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지체 없이 즉시 가동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단순히 인간들의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하나하나 실현되어가는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토록 정밀하게 실행되고 있다면, 왜 사람들은 여전히 죄의 무거운 권세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신음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고통스러워해야 합니까? 구원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면 이 모든 슬픔은 벌써 사라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타락 이후 인간의 실존을 아주 냉정하고도 명확하게 요약하여 보여줍니다. 창세기 5장을 펼쳐보면 소위 '죽음의 족보'라고 불리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 말씀은 이후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게 동일한 리듬으로 반복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에노스도, 게난도, 마할랄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수백 년을 살았고 수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당시 사회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 모든 인생의 결론을 단 한 문장으로 끝맺습니다. "그는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 '죽었더라'는 단어의 반복은 인류가 처한 가장 비참하고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폭로합니다. 오래전 영국의 한 유명한 정치가가 아직 평범한 시민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우연히 길을 걷다가 교회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예배당 앞에서는 누군가 성경을 낭독하고 있었는데, 뒷자리에 앉은 그에게는 모든 내용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구절만은 천둥소리처럼 그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살고 죽었더라. 살고 죽었더라." 누구는 몇 세를 살고 죽었고, 또 누구는 자녀를 낳고 살다가 결국 죽었다는 이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 그는 인생의 근본적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아하, 인간은 결국 누구나 예외 없이 죽는 존재구나.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 깨달음은 그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그는 훗날 19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수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것은 대단한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이처럼 인간의 유한함을 직면하는 정직한 순간에 시작됩니다. 인간은 사는 동안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큰소리를 치고 대단한 권세를 누리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 위세를 떨치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는 순간, 그 위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죽음 앞에서는 제왕도, 거부도, 학자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어떤 해부학 교수님은 "시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살아 있는 사람이 더 무섭지, 죽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나를 해친 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지만,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우리 인생의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돌려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지혜의 시작입니다.


‘때를 따라’ 진행되는 하나님의 경영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죽음이 위세를 떨치는 세상 가운데서 이 죽음을 죽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경륜'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경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에서 왔는데, 이는 가정을 관리하거나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무질서하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역사를 경영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들이 첫 아들 가인을 낳았을 때, 그들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외치며 기뻐했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사탄의 머리를 깨뜨릴 '여자의 후손'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곧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그들 부부에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성장하며 보여준 모습은 구원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다가 결국 들판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죄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큰 충격과 낙심에 빠졌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벨', 즉 '헛되다' 혹은 '숨결처럼 허무하다'고 지은 것은 당시 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줍니다. 인간적인 기대가 무너지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다시금 일하셨습니다. 아벨 대신 '셋'을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보를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인간의 조급함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역사의 무대를 차근차근 준비해 오셨습니다.


사망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

그 오랜 준비의 과정 동안 죽음은 여전히 인류 가운데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사망에게 굴복하지 않고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죽음을 다르게 묘사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와 불신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하며, 죽기 전에 묫자리를 잘 보거나 가묘를 써서 장수하기를 바라는 유치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을 넘어선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와 외국인'의 삶으로 정의했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처럼 이 세상을 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분명한 '본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본향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하늘의 성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죽음을 이겨내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아 생물학적으로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를 여셨을 때, 죽은 것 같은 몸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죽음을 이겨낸 생명의 승리로 해석합니다.


믿음의 승리와 부활의 증거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 가졌던 믿음 역시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네 자손이 번성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만약 이삭이 제물로 드려져 죽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유일한 방법은 이삭이 다시 살아나는 것뿐임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칼을 들었습니다. 그는 죽음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에녹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예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을 통해 죽음이 인생의 최종 권력자가 아님을 온 세상에 증거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의 선조들은 임종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삭과 야곱은 죽음의 문턱에서 자녀들을 축복하며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중단되는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속으로 들어가는 쉼표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백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세력을 멸하며 전쟁에서 이기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였다"는 기록까지 나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망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들의 심령 속에 확실한 실재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젊은 시절에는 뜨겁게 신앙 생활을 하다가도, 막상 육신이 연약해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혹시 내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수 있습니다. 작은 병 하나에도 마음이 요동치고 미래에 대한 염려가 마음을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망을 멸망시킬 위대한 작전은 이미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믿음의 담력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죄의 삯인 사망의 요구를 완벽하게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머리를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이제 사망은 겉보기에는 여전히 위협적인 사자처럼 울부짖지만, 이미 이빨이 뽑힌 존재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에게 확증해 주셨습니다. 주를 믿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위대한 비밀이 밝히 드러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소망했던 그 약속을,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미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믿음의 담력을 가지십시오. 죽음은 결코 우리 인생의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낡아지고 세상의 삶은 끝이 있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토록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들고, 하루하루를 죽음의 공포가 아닌 승리의 기쁨으로 살아내십시오. 사망을 죽이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전진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